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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색달 Apr 17. 2024

'마지막 황제'는 마지막이 아니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황제

지구상 마지막 황제는 1906년에 태어난 푸이다. 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신해혁명,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에서 문화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한 삶을 살다가 자리에서 내려와 평범한 시민이 되었고 1967년 사망했다. 푸이의 영화 같은 삶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에 의해 ‘마지막 황제’라는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9개 부문 수상하며 아직까지도 불멸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제목이다. ‘마지막 황제’라니? 황제였던 푸이가 사망하고 나서 약 14년 뒤인 1981년 8월 8일. 스위스 바젤에서 새로운 황제가 태어났다. 물론 그때는 아무도 그의 즉위를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 봐도 포스터는 기가 막힌다


20개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 6개의 ATP 결승전 트로피, 올림픽 남자 복식 금메달, 103회의 커리어 타이틀, 19년 연속 팬들이 뽑은 인기 선수, 237주 연속 테니스 랭킹 1위 등. 로저 페더러, a.k.a 테니스의 황제가 가진 기록들이다. 한 때는 테니스가 페더러였고, 페더러가 곧 테니스였다. 아마 테니스 공에게 입을 달아주면 스위스어로 인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6세 때 처음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 테니스 선수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누구는 12살 때 피아노 학원을 땡땡이치고 오락실에서 놀다가 엄마에게 등장 스매싱이나 당하고 있었는데, 로저 페더러는 그 어린 나이에 황제 대관식을 향한 첫걸음을 뗐다. 그로부터 2년 뒤 스위스의 통합 주니어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1998년에는 윔블던 주니어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바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1년 2월 밀라노에서 열린 대회에서 생에 첫 우승을 차지한다. 2003년 윔블던을 우승하면서 생애 첫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따냄과 동시에 그의 압도적인, 아니 테니스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플레이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쨍쨍하게 빛나던 태양이 노을 속으로 사그라지며 힘을 잃듯이, 로저 페더러도 시간의 흐름을 이겨낼 순 없었다. 크고 작은 부상과 체력 저하로 인한 문제로 점점 대회에서 얼굴을 비치지 못하는 일이 많아지더니니 결국 2022년 9월. 테니스계의 황제이자 나의 우상, 로저 페더러는 뜨거운 눈물로 코트와의 작별을 고했다.

그의 은퇴 후, 조코비치가 그의 그랜드슬램 기록을 넘어섰고, 사람들은 테니스계의 GOAT(The Greatest Of All Time)가 누구인지 뽑는 논쟁에서 조코비치를 페더러 위에 올려 두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페더러의 팬보이와 팬걸들은 결사항쟁의 자세로 페더러의 GOAT자리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이제는 사실 조코비치의 GOAT등극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커리어 내내 라이벌이었던 스페인의 라파엘 나달과 테니스 역사상 두 번째로 뛰어난 선수가 누구인지를 두고 다시 한번 양측의 팬들이 맞붙어 싸우는 형국이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인지, 아님 그 밑인지, 아니면 포디움의 가장 낮은 곳에 서게 돼도 상관없다. 테니스 코트에서 우아하게 왈츠를 추듯 라켓을 휘두르던 그의 모습은 전 세계 테니스 팬들은 물론 내게도 테니스의 아름다움 자체로 남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우아함. 숨막히는 아름다움. 강력한 스트로크.


땀과 멋이 만나는 테니스 코트에서 난 내게 테니스라는 모험을 선택하게 만든 로저 페더러를 떠올린다. 비록 티브이를 통해서였지만 페더러의 플레이를 보는 건 절대 눈치채지 못할 트릭을 쓰는 마술사의 쇼와 같았다. 내 백핸드가 그와 맞먹을 수도 없고, 그의 우아함을 조금도 따라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와 같은 종목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커다란 의미이자 감동이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 위대할 필요도 없고, 이겨야 할 이유도 없다. 그냥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이면 충분하다.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쓰러졌을 때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만 하다 보면 된다. 

누구나 로저 페더러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로저 페더러가 아니더라도 테니스는 즐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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