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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색달 Apr 29. 2024

깨질 때 더 아름답고 유익한 것.

세상의 불문율과 나의 불문율.

찬 바람에 실린 봄 향기가 느껴질 때야 말로 테니스를 치기 가장 좋은 날이다. 봄. 이름만으로 설레는 그 계절을 맞이해 나는 언제나처럼 테니스코트로 향했다. 리셉션에서 예약된 코트를 말하고 출입 키를 받아 코트로 향했다. 처음 보는 건장한 남성 셋이 몸을 풀고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짧은 랠리로 몸을 풀고서 게임을 위해팀을 정했다. 내 파트너는 키는 작지만 상체가 넓고 전신이단단해 보이는 분이었는데 나이는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 같았다. 그분이 내게 물었다. “어디가 편하세요? 듀스? 애드?” 코트 오른쪽(듀스코트)에서 플레이할지 왼쪽(애드코트)에서 할지 정하라는 물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서브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듀스코트에 비해 서브를 할 게임이 적을 가능성이 있는 애드코트에 서겠다고 했다. 그분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알겠다며 듀스코트에 섰고 그렇게 게임은 시작됐다. 30여 분이 지났고 우리 팀은패배 했다. 네트 앞에 서서 상대 팀과 인사를 나눈 뒤 물을 마시러 가려는데 파트너가 내게 와서 물었다.

“혹시 테니스 치신 지 얼마나 됐어요?”

“한.. 6달쯤 된 거 같은데요?”

그러자 그분은 어이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아니… 근데 왜 애드코트 했어요?”

“제가 서브가 자신이 없어서….”

“하아… 앞으로 어디 가서 칠 때 듀스코트에서 하세요.”

한숨 섞인 날카로운 말을 남기고 그 사람은 홱 돌아서서 자기 짐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분이 꽤 불쾌했지만 대관 시간이 끝날 때까진 짐짓 괜찮은 얼굴로 테니스를 쳤다. 집에 가는 길에 레슨 코치님께 전화를 걸어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물었다. 

“일반적으로 동호회 테니스에선 더 잘 치는 사람이 애드코트에서 플레이해요. 몰라서 그런 건데 그분도 참 너무하시네.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앞으론 듀스코트에 선다고 하세요.”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그게 불문율이에요.”  


불문율. 사전상 의미는 ‘문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법. 관습법이나 판례법 따위’이며 영어로는 Unwritten Law. 쉽게 말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지키는 관습이나 규칙이다. 그리고 이런 불문율을 어길 경우 어긴 측과 상대측 모두 서로에게 불쾌해하거나 심지어 다툼으로 번지기까지 한다. 내가 예로 들었던 경우 역시 다툼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양쪽 모두 안 좋은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문율을 찾아보면 꽤 많다. 특히 스포츠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농구 경기의 경우 큰 점수 차로 이기는 팀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공격 기회에 공격을 포기해야 한다. 야구는 불문율이 엄청나게 많은 스포츠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크게 앞선 팀의 주자는 도루를 하면 안 된다. 상대방을 기만한다는 이유다. 또 홈런을 쳤을 때 배트를 멋지게 집어던지거나, 날아가는 공을 너무 오래 보거나, 베이스를 너무 천천히 돌면 안 된다. 우리나라는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관대하지만 미국 같은 경우엔 불문율을 어긴 선수에게 가차 없이 빈볼이 날아든다. 이렇게 상대 팀을 지극 정성으로 배려하지만 필드에서 싸움 나면 전부 나가서 싸워야 하는 것 역시 야구의 불문율이다.


이렇듯 불문율은 긴 역사를 가지고 오랜 기간 살아남아 어떤 분야의 질서가 되고 법칙이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란 속담처럼 탈 개성을 통한 일원화가 미덕으로 통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불문율은 거의 꼭 지켜야 하는 필수 도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이 불문율을 방금 구입한 값비싼 스마트폰 대하듯 깨지지 않게 이리저리 포장한다. 하지만 해가 쨍쨍한 여름날의 파도처럼 깨질 때 더 아름답게 빛나는 불문율도 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그 완벽한 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1939년 초연된 빅터 플레밍 감독의 역작으로, 마가렛 미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비비언리, 클락 게이블이라는 위대한 배우들이 열연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클래식 영화로 남아 있다. 그리고 할리우드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사가 나왔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과의 관계에 지쳐 그녀를 떠나려 하자 스칼렛은 레트를 붙잡으며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하라고요?”라며 울먹이자 레트는 이렇게 말한다.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번역하면 “솔직히 말하면, 내 사랑. 그 깠건 내 알 바 아니지.” 정도가 되겠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문장이 왜 그리 대단할 걸까? 사실 그 당시 미국은 영화 검열이 무척이나 엄격했던 시기였다. 욕설은 물론이고 간통을 비롯한 성적으로 노골적인 묘사나 대사는 철저히 걸러냈다. 하지만 감독은 이 한 문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Damn이란 단어를 뺄 경우 이 문장이 주는 영화적 충격이 가려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 때문에 제작사는 이 대사에 실린 욕설 한 마디 때문에 검열국과 엄청난 협상을 벌였고 겨우 영화에 담을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영화의 성공과는 별개로 영화산업 자체가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영화는 사회의 현실을 더투명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이는 시민들이 영화와 더 친근해지는 계기가 됐다. 이것이 바로 평범해 보이는 저 문장이 역대 최고의 명대사 순위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하는 이유다. 할리우드의 새로운 시작. 그리고 이 역사의 신호탄은 그들이 불문율을 깨트리는 순간에 짜릿한 환호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불문율은 살아남아 질서, 혹은 법칙이 된다. 그렇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경우처럼 어떤 불문율은 깨어지며 새로운 시대와 진보의 서막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 살아남을지, 무엇이 깨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건 역사라는 거인의 선택지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불문율도 있다. 바로 우리 스스로 정한 개인의 불문율이다.

우리 모두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선택과 결정에는 우리의 주관이나 가치관 등이 개입되는데 이것들이 촘촘히 쌓이며 부피가 생기면 그 틈에 불문율이 생겨난다. 물론 나에게도 이런 ‘불문율’이 있다. 일요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거나 책을 읽을 땐 꼭 조용해야 하며 농구하고 오면 꼭 맥주를 마셔야 한다. 글은 집이 아닌 카페나 도서관 같은 열린 공간에서 만 써야 하고 술 마신 다음 날은 운동을 가지 않는다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정말 이 모든 것들을 불문율이라 할 수 있을까? 이들 중 몇몇은 어쩌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혹은 하고 싶은 일만 하기 위해 나 스스로 만든 변명 혹은 버릇이 아닐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그랬듯이 몇몇 불문율을 향해서는 과감히 망치를 휘둘러야 한다. 불문율이란 이름 뒤에 나태와 방만, 그리고 오만과 독선 등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만든 불문율뿐 아니라 스포츠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널린 이상하고 비상식적인 불문율은 타파되어야 한다. 그 모든 결과가 혁신이나 진보를 불러일으킬 순 없지만 적어도 새로운 시각을 만들 수는 있다. 시각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말을 만들고 말은 행동을 만든다는 걸 생각하면 불문율 부수기는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이제 나는 집이나 사무실에서 글을 쓴다. 농구를 하고 오면 맥주 대신 막걸리를 마시기도 한다. 일요일에 유튜브 영상 편집을 하고 책을 읽을 땐 창문을 열고 세상이 만든 멜로디를 듣는다. 그리고 여전히 테니스를 칠 때 내가 서고 싶은 쪽 코트에 서고 파트너에게도 원하는 쪽에서 플레이하라고 요청한다. 결과는 확실했다. 

나는 더 자유로워졌고 삶은 더 풍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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