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테니스 레슨장을 바꾼 이유.
처음 방문하는 미용실에 들어가 거울 앞 의자에 앉거나, 독서 모임에 처음 온 분들을 만날 때, 테니스 코트에서 처음 합을 맞춘 복식 파트너와 잠깐 휴식을 취할 때. 이럴 때마다 꼭 듣는 말이 있다.
‘인상이 좀 강하시네요… 하하’
작고 찢어진 쌍꺼풀 없는 눈, 콧대도 아닌 게 쓸데없이 치솟은 광대. ‘조커’ 먀냥 왼쪽으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햇빛에 그을려 얼룩덜룩해진 피부. 어찌 보면 ‘좀 강해’ 보인다는 말에 감사를 표해야 할 인상이긴 하다. 진짜 싹수없어 보였다는 첫인상 평가를 듣는 건 흔한 일이고, 지인들 중에는 여전히 나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다. 살아가면서 득 볼 것 없는 인상이지만 좋은 점도 있다. 거리에서 ‘도를 믿으십니까?’ 하는 질문은 안 들어도 된다.
생긴 건 그렇지만, 난 외모와 달리 정이 많다. 얕은 정을 널리 뿌리는 사람은 아니고 깊은 정을 좁게 심어 가는 스타일이다. 그렇다 보니 한 번 정이 들기 시작하면 쉽게 정을 떼기가 어렵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좀 더 심하다. 유년시절과 학창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있을 때가 많아서인지 ‘정’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다. 사람이나 동물뿐 아니라 사물에게도 이름을 붙여주고 정을 줬다. 이제는 없지만 민지(민트색과 베이지색이 섞인 자전거 이름)와 택이(어릴 적 모토로라 핸드폰 스타텍에 붙여준 이름)는 한 때 나와 가장 많은 정을 주고받던 친구들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상황을 비슷하다. 6년 넘게 운영 중인 독서모임으로 인해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의 자유시간은 사라졌고, 펜데믹으로 인해 모임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어려웠을 때는 사비로 운영비를 충당해 가며 모임을 유지했다. 평일 퇴근 후의 자유와 휴일 오전에 즐기는 게으름, 그리고 치킨 한 마리에 맥주 한 잔 값을 포기해 가며 모임을 이끌어 온 이유는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 모임원들과의 정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에 휘둘리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돈과 관련 됐을 때다. 가끔 돈 빌려달라는 연락이 오면 나는 금액이 크고 작고를 떠나서 무조건 거절한다. 힘들다고 얘기하는 친구에게 내가 먼저 돈을 빌려준 적은 있다. 하지만 먼저 돈을 빌려 달라는 친구의 요청은 단칼에 거절한다. 우정을 빌미로 돈을 빌리는 사람을 만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보낸 정을 나의 약점이라고 생각한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그런 사람에게 정을 주고 마음을 준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타오른다. 돈과 관련해선 그 어떤 예외도 없다. 군 제대 후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묵을 곳이 없어져 대학교 세미나실에서 겨울을 보내고 난 뒤에 생긴 확신이다. 그로부터 약 이십여 년이 지나고, 다시 학 번 확신을 가지고 정을 떼어버린 일이 생겼다.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 테니스 레슨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언제나처럼 레슨을 위해 일찍 도착해 몸을 풀고 있었다. 코트에는 레슨생과 코치님.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코치 님은 레슨생과 공을 주고받으면서 옆에 있는 남자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슨은 끝이 났고, 나는 이전 레슨생과 함께 공을 정리하며 옆에 남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 치는 사람이고 코치님과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 듯하다고 했다. 더는 물을 게 없어 재빨리 공을 주운 뒤 레슨을 받기 위해 코트 베이스라인 근처로 이동했다. 코치님은 반대편 코트로 넘어가셨고 처음 보는 남자도 코치님을 따라 그 옆에 섰다.
‘동현 씨. 이 사람 누군지 알아요?’
‘아니요. 잘 모르는데요.’
‘아! 유튜브 잘 안봐? 이 사람 유명해요. 요즘!’
이어진 코치님의 말을 들어 보니 그 남자는 유명 테니스 선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는 사람이었다. 테니스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 중,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들 몇몇을 뽑아 훈련을 시켜서 실력을 향상해 주는 콘텐츠였는데 거기에서 뽑힌 남성이라고 했다. 들으면서는 ‘아!’ , 오오!’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속으론 별 신경 안 썼다. 선수도 아니고, 선수 출신도 아니고, 베테랑도 아니고, 그냥 테린이 중에 좀 잘 치는 남자를 동경하거나 부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곧 레슨이 시작됐다. 코치님은 언제나처럼 장갑을 낀 손으로 라켓을 휘둘렀고 다른 한 손으론 열심히 카트에서 공을 빼냈다. 그러던 중 옆에 서있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라켓을 그 남자에게 넘기더니 내게 말했다.
‘이 친구 잘해! 이 친구한테도 좀 배워요.’
그리고는 핸드폰을 만지며 코트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코치 자리를 넘겨받은 그 남자는 자연스럽게 코치님이 하던 대로 공을 쳐 줬고 내게 이런저런 충고를 했다. 레슨이 끝날 때까지 코치님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나는 ‘잘 치는 테린이’에게 수업을 받았다. 언제나처럼 코트에 떨어진 공을 주워 박스에 담았지만 처음으로 코트를 나갈 때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란 인사는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내가 그 코트에 갈 일은 없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그리 길지 않은 생각의 시간을 가진 뒤, 코치님께 문자를 보내 더 이상 레슨을 받지 못할 것 같다고 통보했다. ‘우당탕탕 테니스’ 톡방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오늘 있었던 상황을 대략적으로 말해 줬고, 다들 좋은 결정이라고 이야기해 줬다. 좋은 레슨장이 있으면 알려달는 말을 끝으로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코치님의 답장은 다음 날 점심때가 돼서야 왔다. 무슨 일이 있냐는 문자에 저에게 더 잘 맞는 레슨을 받고 싶다고 짧게 답을 보냈다. 얼마 가지 않아 바로 답장이 왔다. 고생했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흔한 메시지였다.
내가 만약 대학생이거나 20대였다면 레슨장을 바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몇 달 동안 레슨을 받으며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운동을 하지 않을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생각할 법한 일이다. 그렇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느낀 게 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에너지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내가 가진 에너지는 나이를 먹을수록 빚쟁이의 카드 한도처럼 낮아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를 적재적소에 적당량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꼭 필요할 때 쓸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만약 없는 에너지를 끌어오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라는 값비싼 이자를 치러야 한다. ‘정’도 당연히 이 에너지에 속한다.
그럼에도 다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정할 줄 알아야 한다. 줘야 할 정을 주는 것보다 주지 말아야 할 정을 주지 않는 게 훨씬 중요하다. 쓸데없이 비싼 핸드폰 요금제를 저렴한 걸로 바꾸고 그 돈으로 넷플릭스를 구독해 ‘피지컬 100’을 시청하는 게 현명한 선택인 것처럼 정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핸드폰 요금제가 아무리 비싸도 내가 쓸데없이 보내는 정 보다 귀하진 않다.
머릿속으론 잘 알지만 막상 누군가와의 연을 끊거나, 늘 해오던 일은 그만 두든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빴던 기억이나 힘들었던 기억 대신 즐겁고 친근한 기억이 떠오른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나 역시 처음 테니스를 배웠던 장소와 익숙해진 코치님을 떠나는 게 쉽지 만은 않았다. 난 그때 직감과 본능을 믿었다. 타인이 아닌 자신에 대한 결정의 기준을 정할 때 직감과 본능은 꽤 훌륭한 잣대가 되어준다. 다행히도, 그날의 선택은 전 보다 더 큰 정을 붙일 수 있을 법한 코트와 환경, 그리고 코치를 만나게 해 줬다. 그 이후로 정 떼는 걸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내 주변에서 사라질 것을 아쉬워 하기 보다 여전히 내 곁에 남은 것에 만족하려고 한다. 그렇게 둘러본 내 주변엔 내가 가진 정을 다 뿌려도 부족할 만큼이나 소중한 것들이 많았다. 무정할 수 있어서 나는 여전히 다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