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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색달 Mar 28. 2024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가는 건.

행운의 랠리를 불러온 것에 대해.

나에 대한 평판 중 자랑할 만한 것들을 뽑아보면, 첫 번째. ‘담배 피우게 생겨서 담배를 안 피운다.’, 두 번째. ‘책과는 장벽을 세우고 살 것처럼 생겼는데 책을 많이 읽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으르게 생겼는데 시간 약속을 참 잘 지킨다.’ 이렇게 세 가지다. 좋은 평판은 다 생긴 거랑 달라서 생긴 평판이고 나쁜 평판을 다 생긴 대로 놀아서 만들어진 평판이다. 이 정도면 내가 대충 어떤 외모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지 아시리라.

담배는 아버지 때문에 피우지 않는다. 원래 하루에 한 갑은 기본으로 태우셨던 아버지는 나를 낳고 담배를 끊으셨다. 아들에게 나쁜 모습을 보이기 싫으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를 실망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책은 어려서부터 버릇처럼 읽어왔다. 맞벌이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방과 후 나의 목적지는 집이 아닌 부모님의 약국이었다. 스마트폰은 공상과학 그리기 대회에서도 나오기 힘들었던 시절이었고, 부모님은 손님이 없을 때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으셨다. 조용한 약국 안에는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 문밖 도로의 소음, 그리고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할 게 없던 나도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책장 넘기는 소리를 더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보니 심심할 때 책을 찾는 건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 두 가지와 달리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데는 생각나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늦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 게 미안해서, 성격이 급한 편이어 서일 수도 있다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기대하고 있어서’인듯하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기대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색다른 장소로의 여행을 기대하는 마음이 나를 빨리 그 시작 지점으로 가게 한다. 소풍날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날씨를 확인하고 옷을 챙겨 입고 시계만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나도 약속을 기다린다. 그래서 테니스 레슨에 늦어본 적이 없다. 테니스 레슨이 나에게는 소풍이다.


포핸드와 백핸드 스트로크가 어느 정도 몸에 익었을 무렵, 나는 레슨 시작 시간보다 훨씬 일찍 코트로 갔다. 손이 라켓에 익숙해진 만큼 테니스는 더 어려워졌다. 코치님은 더 이상 내가 치기 좋은 위치로 공을 보내주시지 않았다. 코트의 좌측 끝과 오른쪽 끝으로 번갈아 공을 날렸고 나는 부지런히 달려 공을 쳐야 했다. 지금까지 했던 훈련과 차원이 다른 강도와 난이도였다. 그러다 보니 레슨 전에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충분히 해야 했고 내 앞타임 레슨이 시작될 무렵부터 몸을 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슨이 이뤄지고 있어야 할 코트가 텅 비어 있었다. 전 시간 레슨생이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 처음 보는 묘령의 여성이 코치님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성은 피부가 하얗고 키가 작았지만 몸이 탄탄해 보였다. 하얀색 테니스 스커트와 하얀색 반팔 티셔츠에 나이키 모자를 쓰고 있었다. 누가 봐도 테니스 플레이어였다. 자신을 향한 눈길이 느껴졌는지 여자는 나와 눈을 마주쳤고 코치님께 손짓으로 내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어! 오늘은 엄청 일찍 왔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어색한 몸짓과 표정으로 다가가자 코치님은 내게 그 여성을 간단히 소개해 줬다. 한껏 멋을 부린 그 여자는 내 전 전 타임 레슨생이며 테니스를 시작하지 일 년이 조금 안 됐다고 했다.

"지금 타임 비었는데 둘이 랠리 한 번 해봐요."

코치님은 말을 뱉고 이제 알아서 하라는 듯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행히 어리바리해지고 있는 나와 달리 내 앞의 여성은 익숙하게 랠리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라켓을 잡은 지 이제 겨우 두 달 조금 넘었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과 하는 랠리는 처음이란 사실을 얘기했고 그녀는 웃음 띈 얼굴로 그냥 레슨 때 처럼 하면 된다며 반대편 코트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얼른 라켓을 가져와 코트 중앙에 서서 허공에 스윙했다. 반대편 코트에서 몸을 풀던 여자는 한 손으로 공을 높게 추켜올리며 나와 눈을 맞췄고, 이내 공을 땅에 튕기더니 라켓으로 공을 때려 내 쪽으로 보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랠리가 시작됐다.


약 15분간 이어진 랠리는 엉망이었다. 공이 서너 번 이상 이어진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이 나의 실수였다. 코치님의 보내주시는 공과 랠리 공은 너무나 달랐다. 좌, 우만 신경 쓰면 됐던 레슨볼과 달리 실제 랠리에서는 좌·우는 물론 앞, 뒤도 신경 써야 했다. 뿐만 아니라 튕겨 올라오는 공의 높이도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격 시 공의 높낮이를 파악해야 했다. 랠리를 통해 현재 내 실력을 알고 싶었지만 랠리가 끝나고 알게 된 건 난 아직 ‘실력’을 논할 준비조차 안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나에게 다가온 여자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도 구력에 비해 잘 치시는데요?’

그녀는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칭찬을 건넸다. 난 부족한 실력인데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고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코트 바닥에 라켓을 놓고 스트레칭을 시작했을 때 코치님이 레슨을 위해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랠리는 어땠냐는 물음에 내가 느낀 점을 솔직히 말했다. 코치님은 그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자신감 있게 하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셨고 그날 레슨을 시작했다.


레슨 전에 랠리의 영향인지 몰라도 평소보다 훨씬 더 힘든 이십 분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고 코트 위에 공을 한쪽 구석으로 모으려던 찰나, 코치님이 내게 말했다.

“이제 앞타임이 비는데 오늘처럼 일찍 올 수 있으면 미리 와서 아까 그분이랑 랠리 좀 해요. 그분도 그러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이후로 네 번의 랠리를 했다. 테니스의 인기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때라 비었던 시간대는 이주 만에 젊은 청년의 차지가 되었고 레슨 전 랠리도 끝이 났다. 그 짧은 기간, 그리고 짧은 시간의 랠리를 통해 테니스의 재미와 어려움을 동시에 알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연습과는 다른 긴장감, 누군가와 공을 주고받을 때의 설렘, 상대의 공을 정확히 리턴할 때의 쾌감. 이런 느낌들이 테니스의 매력을 한층 더 높여줬다.

그런 행운을 잡을 수 있었던 건 그날 코트에 일찍 나갔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날의 랠리도 없었고, 그 이후의 랠리도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냥 운때가 맞아서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레슨을 기다리다 못해 몸이라도 풀고 싶어 일찍 코트로 나서게 했던 테니스에 대한 나의 열망이 빈 코트 위에서 맞춰지길 바라며 두둥실 떠다니던 운때와 만나서 생긴 행운이었다.

어쩌면 행운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어디 있을지 모르는 행운을 향해 편지를 쓰고 있다. 성실함, 부지런함, 절실함, 진실함이란 이름으로 보내는 편지가 언젠가는 내게 행운을 불러올 것이라 확신한다. 행운도 분명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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