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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색달 Mar 26. 2024

와인 페어링에서 중요한건 안주가 아니다.

테니스 페어링의 결과.

와인과 치즈, 막걸리와 파전, 바람과 연, 여름과 바다, 그리고 빈지노와 시미 트와이스. 이 조합들의 공통점은 서로가 어울리고, 함께하면 큰 시너지를 가져오는 점이다. 개개인도 이와 비슷한 조합이 있다. 나의 경우, 독서할 때는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이나 빌 에반스의 음악을 듣는다. 이 두 음악가의 노래와 함께 책을 읽으면 책에 더 집중하게 되고 내용이 더 오래 기억나는 듯 하다. 또 있다. 글을 쓸 일이 있으면 카페로 가는데 천장이 높은 카페를 찾아간다. 이상하게도 단어나 비유가 더 잘 떠오르고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피곤하지가 않다. 한 번은 날이 좋은 날 야외 공원에 노트북을 들고 가 글을 써본 적이 있었다. 구름을 천장 삼아 글을 쓰면 얼마나 자유롭고 신선한 글이 나올까 기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공원 벤치에는 콘센트가 없었다.

페어링. ‘둘이 짝을 이룬 한 쌍으로 짝을 맞춘다.’ 라는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다. 원래 블루투스 제품을 연결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지칭하는 단어로 많이 쓰였지만, 요새는 ‘와인 페어링’이나, ‘막걸리 페어링’처럼 잘 어울리는 음식 매칭을 ‘페어링’이라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주류 페어링’이 꼭 필요 한가 싶다. 음주 경력 이십여 년의 베테랑 알코홀러의 입장에서 안주는 옵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메인은 언제나 같이 마시는 사람이다. 피렌체의 ‘토마호크 스테이크’에 값비싼 프랑스산 메를로 와인을 회사 부장님과 마실 바엔 꼬북칩 매운맛에 5,900원짜리  마트 와인을 여자 친구와 마시는 게 훨씬 낫다. 아. 물론 부장님보다 여자 친구랑 마시는 게 힘든 순간도 있지만.



악몽의 첫날 레슨 이후로 매주 두 번씩 테니스 레슨을 받으면서 나는 ‘테니스 페어링’을 찾기 시작했다. 테니스와 어울리는 음식을 찾은 건 아니다. 테니스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다른 기초 운동을 찾으려 했다. 레슨을 받으며 기초 운동을 함께 하면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실력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테니스 페어링 운동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신경 쓴 건 레슨을 받으면서 느끼는 나의 부족한 점이었다. 대략 적어 보면 이렇다.

‘집중력 부족’, ‘느린 스텝’, ‘손목 풀림’, ‘라켓 백이 느림’, ‘스윙이 중간에 멈춤’, ‘동체시력 떨어짐’, ‘라켓 면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음’, ‘무릎을 쓰지 않음’, ‘체중 이동이 안 됨’.

사실 거의 다 제대로 안 된다. 아마 내가 테니스의 연결 동작을 더 세분화해서 배웠다면 저 목록도 더 세분화되었고 길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코트 위에서 잘하는 게 하나 생기긴 했다. 이제 공은 기가 막히게 줍는다.



레슨 3주차에 내가 찾은 테니스 페어링 운동은 ‘러닝’이었다. 다른 세세한 부분은 레슨과 코칭을 통해 고칠 수 있겠지만 체력은 따로 노력하지 않고선 절대 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십 분 남짓한 짧은 레슨 시간의 후반부는 늘 비슷한 모습이었다. 호흡이 불안정해졌고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공을 타격하기 위한 위치에 늦게 도달하다 보니 스윙도 타이밍이 늦었다. 늦은 타이밍을 바로잡고자 라켓을 제대로 빼지 못한 채 휘두르게 되고 라켓은 제대로 된 면이 만들어지지 못한 채 공을 때린다. 공은 하늘로 솟아오르거나 땅으로 처박힌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공을 바라보고 반대편 코트에서 ‘다시!’라는 성난 목소리가 나를 때린다.

결국 체력이었다. 적어도 그 레슨 시간동안 만큼은 지치지 않을 체력이 필요했다. 술 한 잔 사줄 테니 나오라는 전화에 반응하듯 바로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만큼 테니스를 잘 치고 싶은 열망이 컸다. 개인지도가 없는 날 저녁에 집 근처에 위치한 ‘율동공원’을 달렸다. 테니스를 배우기 이전에는 다이어트를 위해 자주 달렸던 장소다. 중앙에 커다란 호수를 산책로가 둘러싸고 있는데 한 바퀴를 돌면 약 1.8킬로미터 정도 된다. 한창 달릴 때는 6바퀴씩 쉬지 않고 달렸었지만 오랜만에 뛰어보니 한 바퀴도 제대로 뛰지 못하고 숨을 헉헉거렸다. 십 분도 제대로 못 달리면서 이십 분의 테니스 레슨을 받으려 했던 내가 무모하게 느껴졌다. 목에서 칼칼하게 올라오는 피 맛과 금방이라도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한 폐의 격렬한 움직임을 느끼며 다시 달렸다. 금방이라고 멈추고 싶을 때마다 머릿속으로 여유 있게 포핸드 스트로크를 치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되리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고통이 나를 그 이미지와 조금은 가깝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테니스 페어링 운동으로 선택한 러닝은 절반의 성공을 가져왔다. 율동공원에 가는 날들이 쌓이자, 개인지도 중간에  중간에 힘들어서 주저앉거나 스윙을 못 하는 일이 없어졌다. 코치님도 놀라며 내게 요즘 체력이 아주 좋아진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내 테니스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스텝은 느렸고, 타이밍은 늦었고, 스윙은 일관되지 않았다. 전보다 정타가 많이 나오고 덩달아 호쾌한 타격음이 마음에 설렘을 때려 넣기도 했지만, 율동공원을 달리며 떠올린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다시 한번 생각했다. 테니스는 힘들고 어려운 운동이다.

그 뒤로 한동안 꽤 많은 테니스 페어링 운동을 병행한 적이 있었다. 인터벌 달리기, 줄넘기, 밴드 당기기, 턱걸이 등 유튜브나 블로그를 검색해 테니스에 좋은 운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페어링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체력도 좋아지고, 테니스 실력도 올라가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내가 원하던 내 모습이 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커다란 부작용이 찾아왔다. 테니스가 일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렇듯, 테니스가 재미없어졌다. 사람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테니스를 향한 과정이 많아질수록 테니스와 나와의 거리는 멀어졌다. 다른 운동을 열심히 하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게 답답했고, 계속해서 힘들게 운동을 해야만 테니스를 칠 수 있다는 사실이 막막했다. 잠깐 지나는 터널이라고 생각했던 기간이 깊은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나는 테니스를 칠 수 없는 건가?’ 라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올 무렵, 나는 결심했다. 테니스 페어링을 그만두기로.



다른 운동을 일정에서 지우면서 내 조급함도 함께 지워졌다. 마음속 이미지를 향해 돌진하게 만들었던 조급함이란 채찍이 사라지니 비로소 내가 치고 싶던 테니스가 눈앞에 나타났다. 첫 레슨에 비해 훨씬 발전된 내가 보였다. 테니스를 치고 싶어 레슨 전날 잠을 설치던 내가 돌아왔다. 늘 인상을 쓰고 레슨을 받던 얼굴 대신 실수를 해도 웃고 있는 내가 있었다. 결국 테니스도 술이랑 똑같았다. 와인이랑 파전이랑 먹어도, 맥주랑 김치찌개를 먹어도 함께 하는 사람이 좋으면 다 좋은 것처럼, 스텝이 좀 늦어도, 근력이 좀 부족해도, 공이 좀 하늘로 솟구쳐도 좋았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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