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레슨에서 배운 것.
‘선 간지, 후 실력’ 모든 스포츠에 대한 나의 철칙이다. 오랜 기간 나의 취미 리스트의 가장 상단을 차지한 농구를 하면서 생긴 고집이다. 일단은 멋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멋’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팀을 정할 때는 아무래도 ‘멋’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먼저 뽑히게 된다. 경기중에 실제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더라도 뭔가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멋’이 있으면 의도치 않은 플레이가 실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 신체 조건이 좋고 피부도 까무잡잡하다 보니 조금만 꾸미면 멋이 좀 잘 나오는 편이었다. 물론, 경기중에 내게 쏟아지는 의심의 눈초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첫 레슨을 앞두고 가장 먼저 한 일도 테니스 옷과 신발, 그리고 헤어밴드를 사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사 온 옷을 입어봤다. 완벽했다. 100미터 밖에서 봐도 테니스 선수였다. ‘선 간지’는 충분히 챙겼으니 이제 ‘실력’만 만들면 됐다. 나는 오매불망 첫 레슨날만을 기다렸다. 빨리 실력을 만들어 사람들 앞에서 나의 멋진 모습을 선보이고 싶었다. 농구처럼 힘들고 어려운 운동을 꾸준히, 그리고 곧 잘 해왔던 나였기에 테니스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공 오면 라켓으로 맞추기만 하면 되는 스포츠. 공도 큼지막하고 라켓도 충분히 큰 쉬운 스포츠. 뛰어 봤자 조그만 코트 좀 왔다 갔다 하면 되는 안 힘든 스포츠가 내가 생각하는 테니스였다. 그렇게 대망의 레슨날 아침이 밝았다.
처음 레슨장에 도착한 나를 본 테니스 코치님의 눈빛은 농구코트에서 나를 보던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큰 키에 까만 얼굴, 건장한 체격, 머리 끝 부터 발 끝까지 나이키로 도배된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사무실 의자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질문을 쏟아냈다.
“키가 크시네요? 키가 몇이에요?”
"184정도 됩니다.”
“몸무게는?”
“83킬로 정도?”
“다른 운동 한 거 있어요?”
“네! 농구 했습니다.”
“선수?”
“아니요. 그냥 아마추어 농구팀 소속입니다.”
“탁구나 배드민턴, 스쿼시는 안 해봤어요?”
“군대에 있을 때 탁…”
“아. 네네. 알겠습니다. 일단 저기 뒤에 라켓 중에 맘에 드는 걸로 들고 나오세요.”
코치님의 손 끝이 가르킨 곳엔 우산꽂이와 비슷한 모양의 거치대에 라켓들이 여러 개 꽂혀 있었다. 뭘 고를지 몰라 고민하던 나를 보더니 코치님은 검은색 테두리 중간에 녹색이 칠해진 라켓을 집어 주셨다.
“이게 제일 무난할 거예요.”
라켓을 잡고 코트로 나섰다. 먼저 라켓 잡는 법을 배우고 스윙하는 법을 배웠다. 코치님은 마치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듯이 계속해서 내게 말했다.
“라켓 떨어트리고, 스윙은 부드럽게. 길게 보낸다는 느낌으로 끝까지.”
나도 모르게 코치님의 주문을 따라 외울 때쯤, 코치님은 공을 가지고 내 옆에 섰다.
“자. 이제 내가 공을 떨어뜨리면 공이 최고점에 올라왔을 때 스윙하면 돼요.”
‘참나.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무슨 이런 거 까기 해야 해?’
마음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코치님이 튕겨준 공을 향해 힘껏 라켓을 휘둘렀다. 공은 네트 중간에 처박혔다.
‘아. 이런 내가 너무 방심했다.’
다시 스윙. 다시 네트. 다시 스윙. 다시 네트. 다시 스윙. 이번엔 홈런…
“몸에 힘 빼고. 스윙 끝까지! 손목 쓰지 말고! 공 봐야지! 공!!”
어느새 코치님은 논산 훈련소 조교처럼 나를 향해 이런저런 주문을 큰 목소리로 외치고 계셨고 나는 어리바리한 훈련병처럼 실수를 연발했다. 식은땀인지 진땀인지 모를 분비물이 얼굴과 온몸을 가득 적셔 갈 때 코치님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공 주워서 여기에 담아 놓고 가시면 됩니다.”
훈련소 조교 같던 목소리가 다시 온화한 코치님의 목소리로 변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얼빵한 훈련병처럼 멍한 상태였다.
‘와… 나 더럽게 못하네.’
‘선 간지, 후 실력’을 나의 농구 철학으로 정한 이유는 어느 정도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멋은 엄청나게 부렸는데 실력이 어처구니없다? 워런 버핏 앞에서 주식 자랑 하는 것만큼 창피한 일이다. 오늘의 내가 그랬다. 공도 큼지막하고 라켓도 충분히 커서 맞추기만 하면 되는데. 뛰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했는데. 심지어 날아오는 공도 아닌 제자리에서 튕겨 올라오는 공이었는데. 그런데도 나는 공을 제대로 날리지 못했다. 심지어 아예 공을 맞히지 못한 적도 있었다. 충격과 공포였다. 더 큰 문제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감도 안 왔다는 점이다. 분명히 코치님의 말대로 한다고 했다. 몸에 힘 빼고, 손목 안 쓰고, 공 끝까지 봤고, 스윙 끝까지 했는데 공은 어딘가 점화라도 됐는지 로켓처럼 솟아오르거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머릿속이 학창시절 미적분 수업을 들을 때처럼 꼬이고 엉켜갈 때, 코치님이 소리쳤다.
‘공 빨리 주워요! 다음 레슨생 곧 옵니다!’
나는 놀란 토끼처럼 고개를 들면서 ‘네!’라고 짧게 외쳤다. 얼른 허리를 구부리고 코트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공을 주워 날랐다. 지금이야 요령이 생겨서 금방 정리하지만 첫날에는 공 줍는 것도 레슨 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웠다. 공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손에 들고, 가슴에 안고, 중간에 흘린 걸 다시 줍기도 하면서 겨우겨우 공 정리를 마칠 무렵 다음 레슨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키가 작고 왜소한 여성이었다.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그녀는 회색 운동복 바지에 민무늬 검정 반팔티를 입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에 앉아 코트를 쳐다봤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레슨을 받는지 궁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치님과 여자는 인사를 나누고 각자 코트에 마주 보고 섰다. 코치님이 공을 반대편 코트로 넘겼고 여자는 달려가 스윙했다.
입이 떡 벌어졌다. 스케이트를 타고 미끄러지는 듯한 스텝, 바람에 나풀거리는 플라타너스 나뭇잎처럼 부드러운 스윙, 실내 테니스장을 가득 채우는 호쾌한 타격음, 그리고 정확히 상대편 코트 안쪽에 떨어지는 테니스공. 내가 상상했던 모습을 내 눈앞에서 회색 트레이닝복에 검정 반팔티를 입은 왜소한 여성이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힘이 들었는지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지만,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펑! 펑! 소리를 내며 공을 때려냈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서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주차되어 있는 내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돌아와서 온몸에 걸쳐진 나이키 옷들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다짐했다. 한동안은 저 옷들을 입지 않겠다고.
그날 이후로 나의 운동 철학은 도치되었다. ‘선 간지, 후 실력’에서 ‘선 실력, 후 간지’로. 그 후로 테니스를 치면서 늘 느끼는 거지만 실력이 뛰어나면 옷이나 멋 따위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값비싼 옷보다 예쁜 스윙이, 유명 브랜드의 테니스화보다 가벼운 스텝이, 반질거리는 헤어밴드보다 이마에 맺히는 땀이 훨씬 더 ‘간지’ 난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일부러 멋없게 하고 다니진 않았다. 그냥 요란한 빈 수레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꾸미고 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괜히 쉬워 보인다. 유명 유튜버를 보면서 ‘나도 저 정도는 하겠는데?’라는 생각을 하거나, 친구가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면 ‘저거 되게 쉬운 시험이라더니 진짠가보네.’ 라고 한다거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치는 게 테니슨데 그거 뭐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라며 무시하기도 한다. 그럴 때 마다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일이 쉬워 보이는 건 그 일이 정말 쉬워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그 일을 쉬워 보일 만큼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요즘 내 주변 사람들이 내가 테니스 치는 영상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야. 너 폼이 이상한데? 이게 잘 치는 거야? 이 정도는 나도 하겠다.”
예전 같았으면 ‘네가 해봐!’ 라며 언성을 높였겠지만, 이제는 그냥 씩 웃으며 생각한다.
‘아. 내가 잘하고 있구나.’
테니스는 내 교만과 자만을 데려갔고 그 자리에 여유와 넉넉함, 그리고 겸손을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