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왜 테니스 좋아하니?
어떤 시작의 계기는 오래된 침실을 부유하는 먼지만큼이나 작고 하찮아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내가 테니스를 시작한 경우가 그렇다. 2022년 8월. 엄청난 폭우로 수도권 이곳저곳이 침수되고, 한 남자가 외딴섬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자동차 위에 올라가 오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스마트폰을 하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패러디 됐던 그 여름 즈음. 나는 테니스가 치고 싶었다.
무엇을 처음 시작하는 데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 하고 싶은 마음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끈기. 다 귀찮아질 때도 멈추지 않을 인내심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걸 한 번에 관통하는 성격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는 햇살 쨍쨍한 날의 와이퍼만큼이나 쓸모없고, 가끔은 공든 탑 밑동을 파내는 굴삭기만큼 위협적인 나의 성격. 바로 ‘조급함’이다. 어려서부터 조급함을 끌어안고 살았던 난 콩 심은 데 콩나길 바라기 보다 콩 심은 데서 바로 초당 순두부가 가공된 나오길 바라는 사람이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게 뭔지도 모르고 일단 했고,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거기가 뭐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갔다. 태어 나서 처음 떠나는 두 달 일정 유럽 배낭여행을 출발하기 이틀 전에 계획하고 14시간 뒤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떠났던 적이 있을 정도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속도가 느려졌지만 이따금씩 노익장을 뽐내며 달려 나가는 내 마음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덕분에 첫 테니스 레슨을 향한 나의 질주에 과속방지턱은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실내 테니스 레슨을 검색했고 결과창 가장 상단에 있는 업체를 손가락 끝으로 지그시 눌러 전화를 걸었다. 스마트폰 너머의 중년 남자가 묻는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고 첫 레슨 날을 잡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이제 테니스를 칠 준비가 다 끝났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길 기다리다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나 왜 테니스 치고 싶니?’
당시에 ‘테니스’ 하면 생각나는 건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로저 페더러. 자타 공인 테니스계의 슈퍼 스타. 테니스의 황제. 지금은 은퇴했지만 테니스 코트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나도 이름을 알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원 핸드 백핸드 스트로크라는 걸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테니스 플레이어다. 그때는 그냥 테니스 잘 치는 사람이었던 그는 이제 내게 로저 ‘갓 킹 제너럴 세종 충무공’ 페더러가 됐다.
두 번째는 KBS에서 했던 ‘우리 동네 예체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당시에는 보지 못했지만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이끌어서 몇 번 스치듯 봤던 기억이 있다. 강호동, 정형돈, 성시경, 신현준 등, 연예인들이 이형택, 전미라에게 테니스를 배우고 동호인들과 시합을 하는 콘텐츠였다. 솔직히 방송을 볼 때마다 ‘아니. 저 쉬워 보이는 걸 왜 저렇게 못하지?’라고 속으로 비웃었다. ‘저 정도는 안 배운 나도 하겠는데?’ 하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 이 글을 빌어 그때의 내 생각을 반성한다. 그 쉬워 보이는 걸 그 누구보다 못하고 있는 게 지금의 나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백령테니스회’다. 대학 시절 악명 높은 교내 테니스 동아리 되겠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못 느끼시겠지만 나는 ‘백령테니스회’라는 글자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술 냄새가 느껴진다. 나는 근처에도 가본 적 없지만, 당시 과 후배이자 백령테니스회 회원이었던 김 모 양과 권모군의 진술을 들었을 때 테니스를 치는 시간보다 소주잔을 부딪히는 시간이 더 많은 클럽이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여름방학 때 밴드 연습을 위해 학교를 향하던 나와 마주친 모범생 김 모 양이 펑크를 때우기 위해 계절학기를 듣는다고 슬며시 털어놓음으로써 나의 잠정적 결론은 사실로 밝혀졌다.
이게 전부였다. 친척 동생 결혼식장에서 만난 ‘내가 니 아부지의 아부지의 조카의 형제의 둘 째아들이다.’ 라며 악수를 청하는 친척보다 더 멀어 보이는 사이가 나와 테니스 사이의 거리였다. 당연히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난 테니스 라켓을 꽉 잡기로 했다. 좋아하는 노래가 들리면 가사를 흥얼거리는데 이유가 없듯이 내가 테니스를 치는데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낙엽이 지는 테니스 코트를 시작으로 사계절을 지나 따듯한 봄바람이 부는 코트에서 땀을 뿌리고 있는 나는 2022년 8월의 내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특별한 이유도, 어떤 관계도 없이, 조급하고 성급하게 시작했던 테니스는 이제 내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이자 선생이 되었다. 하얀 선이 질주하듯 그려진 파란색 코트는 나의 새로운 놀이터이자 강의실이 되었다.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며 위로받고, 코트 밖에 떨어지는 공을 보며 실패를 배운다. 테린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기보다 자랑스럽고 테른이를 향한 길고 험한 길이 두렵기보다 설렌다. 거짓말 단 한 개도 보태지 않고 말할 수 있다. 테니스가 내 삶을 바꿔놨다고. 그것도 올바른 방향으로.
테니스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도전 앞에서 고민하는 분들께 감히 말씀드린다. 일단 한 번 해보기를. 도전 앞에서 머뭇거리는 건 안전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이다. 하지만 그 본능을 이겨 낼 때 인류는 진보했다. 나 역시 테니스를 통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걸 얻었고 그걸 바탕으로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이렇게 카페에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이란 걸 써보겠다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나도, 겁 없이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테니스 치는 내 모습을 업로드하는 나도,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일들에 거침없이 뛰어들고 있는 나도, 모두 테니스가 찾아낸 숨어있던 내 모습이다. 이 모든 게 오래된 침실을 부유하는 먼지만큼이나 작고 하찮아서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시작이 만들어 낸 결과다.
‘가장 어려운 것은 행동하겠다는 결심이고, 나머지는 단지 끈기일 뿐이다.’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당 비행에 성공한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말을 믿어보자. 아마 나처럼, 아니 나 보다 훨씬 더 대단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도전을 가로막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대충 접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자. 그 양이 꽤나 많을 것이다. 언제나 하지 말아야 될 이유는 해야만 하는 이유보다 훨씬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