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도시에 살지만 본능은 늘 시골을 향한다. 시골집이 있는 건 축복이다. 사계절 특별히 계획을 세우고 다니는 여행이 아니어도 언제든 가서 자연을 즐기고 시골 정취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시골에 다녀왔다. 올여름에도 변함없이 시골 밭엔 여러 작물이 자라고 있다. 봄에 심은 것들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가장 늦게 심는 들깨모가 자리를 잡고 벌써 발목보다 높이 자랐다. 잡초가 성가신 밭주인은 새벽부터 풀을 밭고랑에 쪼그려 앉아 풀을 멘다.
강낭콩은 이미 수확철이다. 커다란 콩깍지가 주렁주렁 달렸다. 한두 달 전엔 완두콩이 가득했는데 이제 강낭콩 차례다. 그런데 갑자기 "콩깍지가 씌었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사랑에 눈멀어 연인이 마냥 좋은 사랑을 일컬어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는데 콩을 감싼 콩깍지처럼 완꽁꽁 싸매고 사랑이라는 암막이 꽁꽁 싸매고 있다는 뜻일까. 아무튼. 이놈 까놓고 밥 하면 보슬보슬 강낭콩 씹히는 맛이 그리 좋을 수 없다. 봄부터 가을까지 수확할 수 있는 콩 종류가 다르니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이 콩은 밭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봄에 심었던 옥수수는 내 목 높이까지 자랐고, 제법 수염도 긴 옥수수가 달렸다. 며칠만 기다리면 맛난 옥수수를 쪄 먹을 수 있겠다. 방울토마토와 아삭 고추도 주렁주렁 달려 밥상을 풍성하게 해 준다. 먼저 심은 상추는 세어버렸고, 나중에 심은 상추는 아직 먹을 만하다. 한 바구니 따서 저녁에 고기 구워 싸 먹으면 맛있겠다. 감나무에 감이 조그맣게 열렸다. 밤나무는 기다란 꽃들이 떨어지고 작은 밤송이가 맺혔다. 감이랑 밤이랑 발음도 비슷한 것이 가을 간식거리들이 뜨거운 여름 태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6월에 약간은 떫은 듯하지만 달콤한 맛인 빨간 보리수 열매를 푸짐하게도 선사해서 날 행복하게 했던 보리수나무는 이제 무더위에 지친 듯 가지가 축 늘어져 있다. 예쁜 매실이 탐스럽게 달렸던 매실나무도 더위에 지쳐간다. 건너편 넓은 밭에 여남은 명 일꾼들이 일하고 있다. 뭐 하나 보니 파를 심는다. 대부분 외국인이다. 시골 들판을 지키는 일손이 외국인들로 채워진 지 오래다.
논엔 벼가 뿌리를 내리고 단단하게 땅을 잡고 하늘 향해 솟구칠 준비를 하고 있다. 곧 이삭이 팰 것이다. 집 옆을 지나는 농수로에 발을 담가 보니 발이 깨질 듯 물이 차갑다. 저수지 깊은 물이 내려오는지 지하수 보다 훨씬 차갑다. 어릴 땐 아침에 일어나 이 물에 세수하고 학교에 가곤 했다. 이삼십 대엔 도시가 좋아서 시골에만 오면 갑갑하더니 이젠 도시가 갑갑하고 시골만 가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얼른 도시 소풍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