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으로 다시 무거워진 분위기에 당황한 소년이 책상 근처에서 의자를 찾아 앉았다. 의자에 걸터앉아 한동안 바닥을 바라보던 소년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박사의 안색을 살폈다. 무겁게 닫힌 박사의 입술 아래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려 소리 없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해서 점점 부자연스럽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 방치된 낡은 기계를 갑자기 작동시키면 먼지를 내뿜으며 덜덜 떨리는 모습처럼.
“별로 기쁘지 않은 선물인가요?”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꽃이었어. 보라색 히야신스..”
엄마라는 단어가 박사의 입 밖으로 나오자, 뚝을 넘쳐흘러내리듯 박사의 눈에서 눈물이 하릴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사는 꾸역꾸역 눈물을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원래 울지 않는 사람인데… 교정국 정기 정서 검사에서도 늘 문제없이 통과하는데…”
“네.”
소년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박사가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어깨를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든 화분을 꼭 쥐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박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 내가 가장 존경하던 분이셨어… 사랑이 넘치고… 온화하고… 항상 명랑하신 분이셨지… 우리는 늘 보라색 히아신스를 정원 가득 심곤 했지…”
소년은 무슨 말을 할지 찾을 수가 없어서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박사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켜가며 힘들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엄마가… 많이 아팠어. 하지만… 치료받을 수 없었지… 우리는 그때… 도망 다니고 있었거든… 그래서 엄마가… 아주 오랫동안… 혼자 참으셨나 봐… 그러다 어느 날 쓰러진 거지… 그제야 겨우 찾아간 병원에선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하더군… 온몸에 세균이 다 퍼져 있다고… 그런데…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어… 아빠와 나는 그날 교정국에 끌려갔거든…”
“교정국이요? 왜요?”
그 질문이 끝나자, 흔들리던 박사의 어깨가 서서히 고요해졌다. 곧 박사의 눈빛이 매섭고 서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반체제 운동을 하셨거든. 우리는 깊은 숲 속에 모여 로봇과 기술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어.
선조들의 삶처럼, 직접 농사를 짓고, 직접 음식을 만들고, 직접 옷을 지어 입었지. 그게 아빠가 꿈꾸던 세상이었어. 하지만… 그건 아빠가 추구하는 삶일 뿐이었지. 그런데 아무 죄 없는 엄마가,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했어.”
‘엄마’라는 단어가 박사의 입에서 다시 흘러나오자, 그의 어깨가 또다시 미세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가 그렇게 아픈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서 병원에 일찍 모시고 갔을 텐데… 아니면, 아버지를 속이더라도 엄마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거야. 조금만 더 일찍 진료를 받았어도 살릴 수 있는 병이었어. 아버지의 어리석은 신념이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고, 결국 우리를 생이별하게 만든 거야. 너무나 무책임한 사람이야… 나는 절대 용서할 수가 없어…”
유현 박사의 어깨 아래로 눈물방울이 다시금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것이,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참아온 눈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교정국에서 풀려날 수 있었어. 그때 우리가 살던 마을은 전부 추적당했고, 조직은 순식간에 와해됐지.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었어. 그깟 기술이 뭐가 그렇게 두렵다고…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삶을 선택했을까…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어.”
박사는 텅 빈 눈빛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아버지에게 말했지. ‘당신이 죽으면, 그때나 돼서 찾아가겠다고. 그때나 돼서 연락하라고.’
그리고는 집을 박차고 나온 거야. 벌써 스무 해도 더 된 일이야.”
소년은 박사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박사님이 어디서 일하시는지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어요. 아마 오래도록 지켜보셨는지도 몰라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혼자서 정말 힘겹게 살아남아야 했어. 처음 독립했을 땐 고아원에서 지내기 시작했지. 반체제 인사의 자녀라서 더 엄격한 관리 대상이 되었어. 내가 사회에 반해서 살아왔으니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을지 우려가 컸거든. 게다가 기초 교육을 받지 못해서, 연구자가 되려면 더 많이 공부하고 피땀 흘려 연구해야 했어. 더 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 결점 없는 인간을 창조하겠다는 일념으로 최첨단 과학기술을 익히고 연마해야 했지.”
박사는 입술을 앙다문 채 과거에 잠긴 듯이 기계적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 꿈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늘 혼자만의 삶을 살았어.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거야. 이제 불순분자 딱지를 떼고 센터장이 되었고, 연구 결과도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평등한 시민으로 존중받게 되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 화분 하나 보내면… 그동안의 모든 일이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게 될까?”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박사 곁에 앉아 있었다. 들썩이던 박사의 어깨가 가라앉고 나서야, 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를 화장하던 날, 나는 보라색 히아신스를 겨우 구해 엄마의 손에 쥐어드렸어. 너무 향기로웠어. 그 꽃을 품은 엄마의 얼굴이 마치 미소 짓는 듯했지. 엄마는 소복한 보랏빛 꽃이 복스럽고 예쁘다며 늘 좋아하셨어. 하지만 그 꽃을 가장 좋아한 이유는 따로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지. 바로… 그 꽃의 꽃말 때문이었어.”
박사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꽃말이 무엇인데요?”
소년의 질문을 받고도 한참을 망설이던 박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슬픈 사랑, 그리고 용서를 구함.”
그 말을 내뱉자, 박사의 어깨가 다시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어깨가 다시 잦아들었다. 박사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용서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했던 건… 아버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던 것 같아. 아버지를 미워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내 안의 무언가가 너무 미웠지. 아버지를 향한 증오란… 어쩌면 나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여기 화분… 받으세요. 보라색 히아신스.”
소년이 내민 화분을 박사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박사의 침묵 위로 소년이 덧붙였다.
“‘슬픈 사랑, 그리고 용서를 구함’이라고 하셨죠?
할아버지가 주신 화분인 줄 알았는데… 박사님 어머니께서 보내신 선물이었네요.”
소년의 말을 들은 박사의 얼굴 위로, 보라색 히아신스의 향이 조용히 머물렀다.
그 향기 속에서, 평화로운 순간이 잠시나마 박사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