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 씨와 정확하게 같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녀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일들, 결혼 후 겪었던 심경의 변화들에 관한 묘사를 읽을 때 ❛내 이야기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영 씨가 결국 표현하지 못했던 많은 감정이 쌓여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 모습을 보며 유난히 마음이 아팠다.
우리가 가볍게 눌러버렸거나, 무시해버리려 했던 것들을 저장한 저 깊은 곳을 살펴보아야 할 시간이었다. 마음을 찢어버렸던 타인들의 말들 또한 다시 수면 위에 올리고 다시 감정을 다루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워킹맘 애들도 어린이집에서 받아주기도 어려운데 집에서 노는 엄마들까지 애들은 왜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하는 거야! ❞
❝애들 유치원 보내고 할 일 없으니까 몰려다니면서 남편 돈으로 브런치나 먹고...❞
❝이제 애들 유치원 보내면 할 일도 없으면서 뭐할 거니? 남편 혼자 어깨가 무겁기도 하겠다...❞
가상의 세계에서의 나오는 주변인들의 태도는 실제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것이 의미 없는 타인들의 생각과 말이라는 사실은 머리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걸러내려고 하지만, 어떠한 것들은 한 번에 가슴에 박혀 오래도록 상처가 되고 생각의 틀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결코 전업맘과 직장맘을 나누어 ❛누가누가 더 힘든가❜의 대결 구도는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워킹맘이에요❞라고 하면 ❝와 대단하세요. 슈퍼우먼이네요❞라고 고충을 알아주는 분위기가 부러운 적이 많았다. 비교의 개념으로 자신을 평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초라함을 느끼며 열등감이 생기기도 했고 조금은 아프기도 했으며 때로는 억울한 마음이기도 했다. 현재 지키고 있는 이 역할에 대한 가치는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중심은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방심하는 사이에 마음은 꽈배기처럼 꼬여버리기에 십상이었다.
자아존중감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고 불안정한 요소로 환경과 경험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물론 타인의 평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자존감 자체가 낮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임신과 출산을 위해 병원을 방문하는 순간부터 ❛이전의 나❜ 는 사라지고 한 생명을 생산하기 위한 한 마리의 포유동물이 존재하는 경험을 한다. 이전에 탄탄하게 형성된 자존감이라고 해도 외부 환경에 의해 무너져버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경제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자존감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가혹해지는 것이었다. 식사 가격과 거의 비슷한 프랜차이즈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고 집에 가서 가성비 좋고 달달한 믹스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옷장의 옷은 점차 <맞이용 패션; 아이가 등, 하원 할 때 집 앞에 간편하게 입고 나갈 수 있는 옷, 엄마들 보기에 과하지도 후질 하지도 않으면서 갈아입기 편해야 하는 옷>로 바뀌고 있었다. 이런 옷의 특성 때문에 가방은 에코백이나 배낭이 가장 잘 어울렸고, 인터넷 최저가 쇼핑몰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소비였다.
어느 날 문득 예쁜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년이 넘도록 백화점은 지하 식품 매장에만, 그것도 아이들 문화센터 기다리면서 방문하던 것이 전부였던 어느 날, 문득 정장을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10초 만에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 옷을 입고 어디 갈 건데?
애들 유치원 차 마중 나갈 때 입으면? 아이들 선생님 상담하러 갈 때 입으면?❜
경험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떠올려봐도 어울리는 장면은 없었다.
어느 날 문득 회식을 하고 싶었다.
많은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회식은 피하고 싶은 모임이었다. 불편하지만 참석해야 하는 업무의 일부였다. 그런데 너무나 황당하게도 회식을 하고 싶은 것이다. 술은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음식 종류에 따라 맥주, 와인을 함께 한잔하는 것을 좋아하는 정도였다.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모여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 맞는 사람과 기나긴 이야기를 하며 한 잔씩 하는 것은 좋아하는 정도였다. 갑자기 회식의 그 분위기가, 불편하고 갑갑하지만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는 그 기분이 그리워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마음들은 끝내 드러내지 못했다.
❝전업맘 아이들도 누리과정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고
예쁜 옷 사서 예쁘게 입고 싶은 마음이 아직 남아있다고
초저녁이지만 가볍게 나가서 친구들과 소박하게 술 한잔하며 수다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고 말하지 못했다.
말하지 못한 이유는 그 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로 전하진 않았지만, 표정에서 행동에서 아내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남편 역시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 역시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이제 귀 기울여야 할 시간이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