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 퍼머컬처 학교 수료식
*전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함께의 힘을 느끼다
디자인 이론 수업이 어느 정도 끝나면, 우리가 밭을 만들 부지에 실제 디자인을 해보는 시간이 이어진다. 양구 지역의 특징과 남면 공소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각각의 학생들이 자신만의 밭을 디자인해보고 발표하여 채택이 되면 실제로 그 디자인의 밭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실측한 밭 전체의 사이즈에 맞춰 종이에 그려 넣은 후 다들 초 집중모드로 디자인에 돌입했다. 양구의 특산물인 '곰취' 모양의 밭, 나뭇잎 모양, 바람 모양, 파도 모양, 별 모양 등등 이게 될까 싶기도 한 정말 다양한 모양의 밭 디자인이 나왔다. 자신의 취향을 담은 디자인도, 지역적 특색을 담은 디자인도 있었고, 평범해 보여도 스토리텔링을 잘하니 그럴듯해 보이는 디자인도 있었다.
역시 모든 것은 셀링(selling) 기술이다 싶게,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별 모양의 밭이 가장 많은 표를 받고 채택되었다. 특별한 점은 별들의 밭 디자이너님이 말을 참 잘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대지가 길쭉하니 한쪽에 별이 있고, 반대쪽으로는 유성의 긴 꼬리 4개를 가진 디자인이었다. 이 도안을 가지고 우리는 삽질을 하러 밭에 나갔다. 약 300평의 큰 땅에 밭을 조성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잘 고른 땅에 밀가루로 도안을 그려 넣는다.
2. 두둑이 될 부분에 오래된 나뭇가지나 버섯 배지 등, 거름이 될 만한 좋은 재료들을 쌓아 올린다.
3. 길이 될 고랑 부분을 삽으로 파서 두둑이 될 부분에 높게 쌓아 올린다.
4. 어느 정도 길이 생기면, A프레임과 물수평계를 이용하여 수평을 확인한다.
5. 비가 올 때 물이 흘러 내려갈 방향을 고려하여 약간의 기울기를 만든다.
6. 고랑과 두둑이 완성되면 볏짚으로 꼼꼼하게 덮어준다.
7. 길이 될 고랑 부분을 풀이 나지 않도록 신문지나 폐박스, 커피포대 등으로 덮어준다.
대략 20명의 장정들이 붙어서 삽질을 하니 반나절만에 별 모양 밭이 얼추 완성되었다. 가장 까다로웠던 부분은 수평을 보며 기울기를 만들어주는 과정이었다. 기울기를 크게 만든다고 처음에 너무 많이 파다보면 끝에 가서는 어마어마한 양을 파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완만한 사선을 만들되, 물이 내려갈 만큼의 적당한 기울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 부분은 최초에 포크레인으로 땅을 고를 때 어느 정도 맞춰 놓으면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었다.
삽질하고 수평 확인하고, 삽질하고 수평 확인하고, 또 삽질하고. 구슬같은 땀을 흘려 티셔츠가 거의 젖을 때쯤, 디자이너님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서야 삽질이 마무리되었다. 이 날의 경험으로 삽질에 내공이 쌓였는지, 나중에 집짓기 현장에서 삽질 좀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은 식재의 날. 퍼머컬처 밭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 허브들을 배우고, 그늘을 좋아하는 혹은 햇빛을 좋아하는 식물들의 특성에 맞는 위치에 배치하거나, 향신료용 허브, 산나물 등 사용처에 따라 구분하여 배치하였다. 또한 키가 커지는 관목들은 북쪽에 배치하여 커지면서 그늘을 만들지 않도록 하였다.
식재가 끝난 후에는 볏짚을 덮어준다. 논에 둥글게 말려있는 마시멜로우 모양의 흰 덩어리의 정체가 볏짚더미라는 것을 이 날 알게 되었다. 실제 명칭이 따로 있지만 다들 마시멜로우라고 부른다. 굴려서 위치를 잡는데, 무게가 상당하다. 성인 3명 정도 붙어서 굴려야 했다. 볏짚더미를 풀어헤치니 무언가 발효된 듯한 냄새가 났다. 볏짚에 발효균이 있어서 된장이나 술을 담글 때도 볏짚을 활용한다고 하는데, 태양볕아래 잘 말아놓은 마시멜로우 안에서도 발효가 일어나나 보다. 이 냄새 때문인지 볏짚을 온 밭에 다 깔 때쯤 되니 약간 어질어질한 느낌이 들었다.
이틀 만에 300여 평의 땅에 밭을 조성했다. 내 땅에 혼자서 하면 불가능할 일이다. 공동체의 힘을 다시 한번 느꼈다. 실제로 퍼머컬처 네트워크에서는 2025년 사업으로 '삽질단'을 시작했다. 땅이 있고, 설계안도 있는데, 인력이 부족할 때. 네트워크에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기꺼이 밭을 만들기 위해 한 몸 바치는 인력들이 대기 중이다. 퍼머컬처 밭의 모습은 공동체마다 다르고, 농부마다 달라서 서로의 밭에 가면 배울 것도 다르니,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퍼머컬처 밭 투어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모양의 밭을 만들었고, 어떤 식물들이 잘 자라며, 빗물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었고, 생태 화장실은 어떤 모습인지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 끈끈한 관계가 형성된다.
별들이 떨어졌다
모든 수업 일정이 끝나면 결과 발표회와 수료식, 퍼머컬처 농부 장터와 공연, 캠프파이어, 각종 컨버전스 등 퍼머컬처 네트워크 행사가 열린다. 발표회에서는 사람들을 초대해놓고 우리가 조성한 별들의 밭을 중심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고, 어떻게 홍보하고,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인지 계획을 만들어 발표한다.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지만, 남는 사람들이 실제로 운영해나갈 생각을 하니 현실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했다. 오랜만에 팀 과제를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바로 내가 자신있는 ppt 만들기와 디자인 파트를 맡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역할이 분화되었다.
성황리에 발표회와 수료식을 마쳤다. 남은 행사를 참여하지 않고 먼저 떠나는 사람들을 보내는 이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10일 동안 좋은 싫든 합숙하며 생긴 끈끈한 우정에 애틋한 마음 또한 생겨버렸나 보다. 어쩌면 짧은 시간이지만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니 빠르게 친해졌던 것 같다.
나는 하루 더 남아 나머지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남편도 집에서 내 수료식을 보러 와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남은 동문들과 함께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려 술을 사들고 교육 장소였던 마을회관으로 돌아왔다. 밤새 자료를 만들며 준비한 발표회도 끝났겠다 긴장이 풀리고 흥만 남은 상태였다. 사실 이번 수업이 천주교 공소에서 진행됐던지라 실제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수강생으로 많이 참여했다. 천주교 문화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처음엔 그분들이 어렵게 느껴졌는데, 점점 알아갈수록 우리와 별로 다를 것 없는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남편은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는 편인데, 천주교 신부님을 만나 시시콜콜한 농담도 주고받고, 서로에 대한 궁금증도 풀면서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니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행복한 밤을 보내고 각자의 장소로 돌아가는 길. 마을회관의 문을 열자 하늘 위로 한 줄기의 불타는 빛이 떨어졌다. 누군가가 불꽃에 불을 확 붙인 것처럼 보였다. 별똥별이라기엔 상당히 밝았고, 불꽃이라기엔 아래로 떨어지는 방향이었다. 우리는 모두 놀라서 "어어...?", "와아!!", "봤어?" 하는 가지각색의 환호성을 질렀다.
사실 바로 전날, 밤 11시 반 즈음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떨어진다는 뉴스를 들었다. 몇몇 동문들은 소란 쌤과 함께 불빛 하나 없는 마을회관 앞 콘크리트 길에 누워서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떨어지길 기다렸다고 한다. 대략 대여섯 개의 유성들이 시간차를 두고 떨어졌다고. 유성우 목격자들의 무용담에 나까지 마음이 설레는 기분이었는데, 잠이 많은 나는 그 전날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잔 탓에 도저히 늦게까지 깨어있을 수가 없는 체력이었다. 유성우를 보고 온 동문들의 한껏 들뜬 표정에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짓고 있었을 뿐인데, 오늘 밤 이렇게 늦게 떨어지는 하나의 지각생 유성을 우연히 만나니 가슴이 뛰었다. 그것도 마침 여러 동문들과 함께 나가는 길에 한 신부님이 북두칠성 이야기를 하며 하늘을 가리킨 순간이었다. 그 신부님은 또 마침 별들의 밭을 디자인하여 채택된 주인공이라 더욱 의미심장했다. 별들의 밭을 만들고 만난 유성이라니.
나는 사실 많은 자연적 현상이 과학적 사실로 밝혀지는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우리가 달에서 방아 찧는 토끼를 보기를 기대하는 것이라던가 앞마당에 별이 떨어져 요정이 되어 내 친구가 된다는 상상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자연의 미스테리한 현상은 누군가가 재밌는 이야기로 꾸며내 전해지고, 그런 상상력이 판타지 영화가 된다. 나는 어릴 적 디즈니 영화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며 자랐는데, 요즘 아이들은 어떤 것들을 보고 배우며 자라고 있을까.
어느 뜨거운 여름밤, 대한민국의 배꼽 양구의 한 밭에 별들이 떨어졌다. 별들은 밭에서 좋은 거름을 만나 자랄 것이고, 양구의 주민들을 모이게 할 것이고, 다양한 사람들을 연결할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빛을 심어줄 것이다. 이 빛들은 사랑이 되어 멀리 퍼져나갈 것이고, 생태계를 살릴 것이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