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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에서 살아보기

함께 꿈꾸는 삶의 모습

by Hoho

2024년 10월


두 달 동안 인제에 살게 됐다. 갑작스럽게.


강원도로 귀촌하겠다 마음먹고 있었더니 이런 기회가 다가왔다. 관심있게 보고 있던 소 생추어리인 꽃풀소 생추어리가 있는 마을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했다. 귀농귀촌 지원센터에서는 각 마을의 여건에 맞게 1달, 2달, 6달살이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인제에서 신월리와 하추리, 가리산리 세 곳의 마을에서 2달살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공고를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되었는데, 주로 평일에만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라 보통 주말에 사진촬영 일을 하고 평일에 노트북으로 보정작업을 하는 나는 스케줄을 맞출 수 있어 보였다. 타이트한 스케줄이었지만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까 싶어 지원하였고, 선정된 3팀 중 한 팀이 되었다.


나와 남편은 주말부부가 되었다. 나는 평일에 인제에 살고 주말에 일을 하러 집에 간다.




나와 남편은 우리의 꿈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내가 꿈꾸는 삶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기후생태위기에 왜 이런 일들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조잘조잘 이야기하다가 문득 남편은 내 구상에 잘 따라와주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제서야 묻는다.


“이런 삶 어때?”


“다 좋은데 그러려면 한 달에 얼마를 모아야 하고, 시골에서 살면 적어도 얼마씩은 벌어야 하고…”


그는 내 이상향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좁히기 위한 금전적인 해결책을 꾸준히 고민한다. 극 S인 남편에게 어떤 삶을 상상해보라는 주문은 어려웠다. 남편은 특별히 원하는 삶이 없었다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남들처럼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고, 아이를 키우는 삶이 꿈이었다. 아이들을 너무 좋아해서 아이의 체육대회에 참여해 달리기 1등을 하는 아빠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서도 너무나도 경쟁적이고 억압적인 한국 사회의 문화에 적응하길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힘든 친구들을 잘 위로해 주고 포용하는 성격의 그는 남성들 특유의 권위주의적 문화에 이질감을 크게 느꼈다. 나 또한 그런 문화에 물드는 내 모습이 싫었던 것이 귀촌을 결심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시골 마을에 오면 조금 더 느리게 살 수 있다. 내게 맞는 속도를 찾으면 주위에 조금 더 눈길이 가게 된다. 타인에게 한없이 차갑기만 했던 내가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것이 시골의 삶이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우리가 살기 좋은 인간다운 세상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 그러한 대안마을을 만들어 사는 사람들의 사례를 찾아보고 남편에게도 계속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가 어쩌다 평일 쉬는 날이 생겨 인제로 달려왔다. 내가 머물게 된 인제 신월리에는 소 생추어리가 있다. 도축되지 않기 위해 길러지는 소들은 이곳에 유일하다. 아마 5살 먹은 소들도 국내에서 유일하다. 소들을 보호할 축사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가 비건 마을을 구상하게 된 동물해방물결 활동가들이 멋져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진심을 알아봐 준 마을 사무장님과 축산업을 하면서도 생추어리를 받아주신 마을분들이 대단했다. 부정의한 주류의 시스템에 저항하며 관성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설득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더더욱 신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인제 신월리는 평균 연령대가 매우 높고 젊은 사람들이 살지 않아서, 소멸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이 심각성을 느낀 사무장님이 마침 동물해방물결 활동가들을 만났고, 소를 살리기 위해서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그래서 소 5명*과 돌보미 가족 4명이 먼저 인제 신월리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후, 행안부에서 진행하는 로컬브랜딩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폐교가 된 신월 분교를 비건 문화/교육시설로 만들려고 계획 중이다. 환경 운동을 하며 비건이 된 나에게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실 살아보기 프로그램에 지원하기 전부터 이 마을의 소식을 익히 알고 있었고, 이 마을이었기 때문에 지원했던 이유도 있다. 귀촌 후보지가 될지도 모르는 마을에 남편을 초대하게 되어 기뻤다.


*동물해방물결에서는 동물을 세는 단위로 생명을 뜻하는 '목숨 명()'자를 쓰고 있다.



아침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는데, 소양호수에 핀 안개를 배경으로 한 아저씨가 앉아 낚시를 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이 인적드문 마을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홀로 앉아 낚시라니. 지난번 홀로 산책할 때에도 마주쳤었다가 동네 분인가 싶어 가벼운 목인사를 나눴었다. 캔커피 먹고 가라는 아저씨의 제안에 덜컥 겁이 나서 정중히 사양하고 지나쳤는데, 오늘은 남편과 함께 산책 중에 또 마주쳤다. 어김없이 캔커피를 제안하셔서 머뭇거리던 나와 달리 남편은 흔쾌히 캔커피를 받아들었다.


호기심 많은 남편의 질문 세례에 마침 심심했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는 52년생이라고 했다. 우리 아빠보다 5살 더 많은데, 말도 안 되게 젊어보였다. 놀라는 우리의 반응에, 하루 한 끼 자연식물식을 하면 젊게 살 수 있다고 하셨다. 아침 4시만 되면 눈이 떠져서 오토바이를 타고 화천에서 1시간 반을 달려 이곳에 와서 낚시를 한 게 3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들어가보니 그는 육식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폭력성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낚시를 하냐 했더니, 명상이라고 한다. 고요한 물결에 집중하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물살이를 잡고 다시 놓아준다고. 직접 지은 3평짜리 흙집에 살며 직접 담근 된장에 한살림 유기농 쌀로 만든 누룽지를 말아먹는다고 한다. 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낯선 이에게 드러나는 경계심 어린 눈빛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 아저씨의 삶에 자극을 받았는지 앞으로 소식해 보겠다고 했다.


그 만남 이후로 같은 장소로 몇 번 더 산책을 갔지만 자연인 아저씨는 만날 수 없었다. 날이 추워진 데다, 소양호 수위가 점점 높아져 아저씨의 낚시 포인트가 물에 잠긴 탓일테다. 그런데 왠지 그 아저씨의 인상은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내년에도 날이 풀리면 낚시하러 오시겠지? 나중에 내가 흙집을 짓게 된다면 아저씨를 초대하고 싶어졌다. 아니 그냥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



HOHO-229.jpg 소양호 풍경




오후에는 백순심 작가의 <불편하지만 사는데 지장 없습니다> 북토크에 갔다. 백순심 작가는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키가 작고 크고와 같은 별다를 것 없는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했다. 장애가 있다는 것이 다른 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거나 아이를 낳는 등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애주기를 똑같이 누리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건 그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간단한 외출조차 힘든 사회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유명 시각장애인 유튜버의 영상을 많이 보고 있다. 일상에서 불편할 수 있는 부분을 유쾌하게 영상으로 풀어내어 인기가 많은 유튜버인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부분이 불편한 사회가 우리나라였다. 특히 버스를 타는 것과 횡단보도를 건너는 등 정말 기본적인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 장애인이 거리에 많이 돌아다녀도 전혀 괴리감이 없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았다. 당장 나조차도 그런 이들을 만나본 경험이 많이 없기 때문에 어려웠다. 그 이후로 장애인들이 만든 문학이나 유튜브 등의 다양한 콘텐츠에 더 관심이 생겨 눈여겨보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인제 관대리 호숫가로 산책을 갔다. 앞에는 잔잔한 호수가, 뒤로는 든든한 산이 배경이 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오후 2시의 햇빛이 호수에 반사되어 눈부신 윤슬을 만들고 있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딱 상상하던 그, 배산임수의 그런 땅이 바로 이거잖아!”


그 풍경에 반해 아이처럼 펄쩍이며 달려갔다. 마침 밭에서 일하고 있던 외국인과 눈이 마주쳐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남편이 인제에 온 하루 새 일어난 이 모든 사건들이 찰나로 내 마음속에 새겨졌다. 남편에게 나의 상상을 하나둘씩 현실로 보여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걸 단계별로 실천하고 때론 실패하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든든했다.


우리 이렇게만 살자고. 돈보다 우리 개개인이, 동물과 자연과 생명이 더 먼저 존중받는 곳에서 살자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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