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에서 만난 작은 소녀가 던진 질문
홍천에서 퍼머컬처를 하는 분이 운영하는 흙집치유농장에 다녀왔다.
캐나다에서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여행왔다는 던(Dawn)은 마침 이곳에 우퍼로 와있어 함께 밭체험을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퍼머컬처 생활재, 특히 섬유 공예에 관심이 많은 던은 주로 빗질을 하여 나오는 동물의 털을 모아 손수 털실을 짠다고 한다.
관심을 보이니 던은 신나서 직접 방에 있는 수집품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직접 토끼를 키워서 먹는 친구의 농장에서 얻은 가죽과 몽골에서 얻은 사슴의 가죽, 로드킬당한 코요테의 가죽을 손바닥만한 크기의 샘플처럼 수집해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로 겨울용 모자를 만들거야.”
가는 손목과 차분한 톤의 목소리를 가진 던은 때론 직접 사체에서 가죽을 벗기기도 한다고 했다.
“칼로 가죽과 살을 분리하고, 살점을 긁어내는 도구가 있는데 그걸로 이렇게 슥슥 긁어내면…”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살과 가죽을 분리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던은 비건을 하다가 다시 육식을 한다고 했다. 추운 캐나다 북부에서 살다보니, 긴 겨울에도 멀쩡히 팔리는 신선한 채소들은 먼 땅에서 수천km를 날아온다. 그런 채소를 소비하는 것보다 그 땅에서 나는 식재료를 얻는 것이 더 이롭다는 생각에 육식을 받아들였고, 직접 낚시와 사냥을 한다고 한다.
모 와일드의 저서 <야생의 식탁>이 생각났다. 저자는 1년 간 오로지 채집과 어떻게든 얻은 식재료만으로 살아가는 실험을 했다. 채식주의자이지만 혹독한 겨울에는 먹거리를 구하기가 힘드니, 이웃이 나누어준 동물의 사체를 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채식을 하다보니 동물을 먹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간절하게 봄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어떤 마음일지 이해가 가서 정말 슬펐지만 치열한 생존 실험을 응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기후위기와 비거니즘을 공부하고 자연식물식을 지향하다가, 퍼머컬처를 배우고 야생 동물들의 삶에 관심이 생겼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삶의 방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인 늑대를 모조리 사냥한 후 풀을 뜯어먹는 사슴이 번성해 자연이 황폐화 된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사례처럼 자연의 네트워크는 복잡미묘하다. 우리나라에 이토록 고라니가 많아진 것은 천적인 늑대와 호랑이가 사라져서라고 한다. 끝내 우리는 고라니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해버렸다.
고양이는 야생에서 생존률이 낮기 때문에 새끼를 많이 낳는다. 안쓰러운 길냥이들을 돌보는 인간의 손길은 따뜻하다. 허나 그 길냥이가 커서 로드킬을 당하는 건 아닐까. 수많은 생태계의 가능성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운전길에 내 시야를 스쳐지나간 수많은 고양이와 너구리, 고라니의 사체가 생각났다. 납작해지다 못해 어떨 때는 아스팔트 도로에 스며들어 얼룩만 남아버리는 죽음들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의 되새김질로 겹겹이 각인된다. 그러나 또다시 수없이 많은 대부분의 죽음은 잊혀진다. 어쩌면 던이 구해낸 로드킬 코요테의 가죽은 허무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인간으로써 감당하기 어려운 로드킬 사체들을 그녀와 같은 방법으로 애도하고 싶어졌다. 나는 사체에서 가죽을 분리해낼 자신이 없지만 그대로 납작해질 죽음을 생각하면 용기를 내볼 수도 있겠다.
먹거리가 풍성한 우리나라 땅에서만 머문다면 나는 자연식물식을 지속할테고,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자연식물식을 제안했을거다. 그러나 이것이 마법의 열쇠처럼 모든 문제를 푸는 방법이 아닌 것은 확실해졌다.
퍼머컬처가 비거니즘을 포함할 수는 없을까 고민해왔는데,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N개의 환경이 있다면 N개의 퍼머컬처가 있다고 하듯, 퍼머컬처는 그 환경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방식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던이 작은 가죽 조각들을 통해 보여준 세상은 결코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은 꼬이고 꼬인 수학의 난제처럼 내게 남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