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양구에서 열린 PDC 수업의 첫 주차는 이론 수업과 저녁 실습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이론 수업에는 퍼머컬처의 12가지 설계 원리를 바탕으로 밭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을 디자인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원리는 기본적으로 자연의 작동방식을 모방한다. 물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 빛의 방향과 같은 환경을 읽는(해석하는) 법을 배우고, 그에 따라 집과 밭 등의 적절한 위치를 선정한다. 밭의 작목 중에서도 1년생/다년생, 교목/관목, 양지/음지를 좋아하는 식물들 각각의 위치는 그 이후에 결정된다.
시골에서 살 땅을 고를 때 어떤 것들을 봐야하는지 정말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누구나 다 아는 배산임수나 남향, 이 정도만 알았지 제각기 다 다른 지역의 환경에서 어떤 것들을 꼼꼼하게 봐야하는지 더 알고 싶어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식은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퍼머컬처 수업의 시작이 환경 조건을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는 내용이라 많은 도움이 되었다.
퍼머컬처 밭의 가장 뚜렷한 특징인 유기적인 형태의 두둑은 위의 12가지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보통 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일자로 잘 정돈되어 검은색 비닐로 멀칭되어 있는 모습은 자연의 방식이 아니었다.
유기적인 형태로 밭을 디자인하면 자연스럽게 빛을 많이 받는 부분, 덜 받는 부분, 물이 고이는 부분 등 다양한 기후가 형성되는데, 이를 미기후(Micro climate)라고 한다. 미기후가 다양하게 만들어지면 자연스럽게 식물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그 식물을 좋아하는 곤충이나 동물들도 다양하게 모이게 된다. 그렇게 다양성이 살아있는 생태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미기후를 많이 만들수록 기후위기에 강하다고 한다. 여름철 아스팔트 위에 서있을 때와 숲 속에 서있을 때의 온도 차이는 확연하게 다르다. 겨울철 서리 피해를 입히는 골바람은 방풍림을 조성하여 막을 수 있고, 땅 속 뿌리층이 깊은 다년생 식물은 표토가 쓸려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땅 속에 영양분과 수분을 공급한다. 이 원리에 따라서 설계된 퍼머컬처 밭이 잘 성숙하면 그때는 밭을 관리하는 데에 사람의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지 않아 풀을 잡고 가지치기를 하고 먹거리를 채집하는 정도의 노동력만 들게 된다.
퍼머컬처의 12가지 설계 원리
1. 관찰하고 상호작용하라.
2. 에너지를 붙잡아 저장하라.
3. 산출물을 얻어라.
4. 자기 규율을 확립하고 피드백을 받아들여라.
5. 재생할 수 있는 자원과 용역을 사용하고 소중히 여기라.
6. 쓰레기를 만들지 말라.
7. 패턴에서 시작해서 세부사항으로 설계해 가라.
8. 분리하기보다는 통합하라.
9. 작고 느린 해결책을 사용하라.
10.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라.
11. 가장자리를 사용하고 주변부를 소중히 여기라.
12. 변화를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그에 반응하라.
나에게 퍼머컬처 밭은 생태정원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다만 유실수와 허브류가 가득한 정원. 그래서 먹거리 숲밭(edible forest garden)이라고도 부른다. 먹거리 정원이라면 조경으로써의 역할도 톡톡히 한다. 다양한 곤충을 끌어들이는 야생화도 적절히 심어준다면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밭이 된다. 적은 노동력과 풍부한 산출물, 생물 다양성, 그리고 시각적 아름다움까지 충족하는 퍼머컬처 밭은 기후위기의 대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론 수업에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실제 밭을 만들 터로 향했고, 그곳의 빛과 바람 등의 환경을 읽어보는 실습을 했다. 우리가 밭을 만들 터전은 천주교 신부님이 순회하며 지역의 주민들과 기도를 드리는 '공소'로 쓰이던 땅이다. 성당이 들어서기엔 작은 마을에 이런 공소들이 있고, 양구성당 남면 공소는 현재는 쓰이지 않고 있다.
공소 건물은 밭이 될 땅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해가 뜨는 시간에 살짝 그늘이 드리워지지만, 그 면적이 넓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람이 세지 않았고, 기존에 땅을 고를 때 돌이 너무 많아서 마사토를 깔아 기초를 다져놓았다.
지리적으로는 양구 읍내에 가까이 위치해 있고, 주변에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다. 군인 가족들이 많아 젊은 사람들도 꽤 있고 시골이라 당연히 노인들도 많다. 관광지로써는 파로호, 두타연, 천문대 등 깨끗한 자연을 그대로 즐길 수 있는 명소들이 있다.
이 지역의 이야기와 남면 공소의 역사, 그리고 자연조건을 활용하여 어떤 모습의 밭이 만들어질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낮에 이루어진 이론 수업 시간이 끝나면 저녁에는 자율 참여형 워크숍 시간이 열린다. 첫날 저녁에는 신기하고도 강렬한 막걸리 만들기 수업이 있었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밥을 고슬고슬하게 짓고(고두밥이라고도 한다), 거기에 누룩과 물을 섞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깨끗한 손으로 주물러 섞어준다. 우리 몸에는 각기 다른 미생물이 살고 있어서 어떤 사람들이 술을 담그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한다. 여럿이서 함께 만들었으니 어떤 복잡미묘한 맛이 나려나...??
항아리에 넣은 막걸리는 몇 일만 지나도 뽀글뽀글 기포 터지는 소리가 난다. 발효가 잘 되고 있다는 기분 좋은 신호이다. 매일매일 소리를 들으며 언제쯤 먹을 수 있을지 기대하는 맛이 있다. 그렇게 완성되어 수업이 끝나갈 때쯤 거른 막걸리를 다 같이 나누어 먹으니 또 즐거운 맛이 있었다. 그리고 걸러낸 술지게미로 얼굴에 팩을 했는데 다음날 정말 뽀드득하는 고운 피부로 변했다. 이럴 수가...! 귀촌을 하면 피부를 위해서라도 막걸리를 직접 담가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첫째 주 목요일 저녁에는 풀을 위한 연찬회가 있었다. 퍼머컬처 수업을 들으며 중간중간 먹을 수 있는 잡풀에 대한 지식도 배웠는데, 이를 이용해서 정말로 요리를 만들어보고, 마을 주민들을 초대해서 함께 나누어먹는 파티이다. 풀요리도 배우고, 마을 사람들과 교류도 하는 프로그램이라니, 정말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소란쌤이 나누어준 여러 가지 레시피 중 원하는 것을 골라 다섯 팀으로 나뉘어서 만들었다. 허브 비건버터, 토마토 브루스케타, 허브 샐러드, 허브 튀김, 허브 페스토와 뇨끼 등등. 수십 가지의 허브와 야생초, 야생화들을 수확해서 한 상 가득 차려놓으니 알록달록하고 아름다운 뷔페가 완성되었다. 다섯 팀이 한 주방에서 분주히 요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차려놓은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먹을 수 있는 풀을 배운 것도 신기했지만, 이 풀들을 이렇게 요리하면 이런 맛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니 정말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채식한다고 하면 보통 처음 하는 질문은 뭐 먹고 사냐고 묻는 것인데, "나 이렇게 먹어!" 하고 자랑하기에 충분했다. 나의 정원이 생긴다면 매일매일 이렇게 먹고살 수 있을 것 같다.
시끌벅적한 한 주가 지나고, 교육의 중간인 7일차는 자유시간이다. 다들 이 자유시간만 기다려왔는지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가 보다. 양구 지역에 사시는 도예가 '꽃님'님의 레지던스에 초대를 받았다. 양구 내에서도 차로 50여분 더 올라가야 하는 곳에 양구 백자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의 레지던스에 작가로 입주하게 되어 5년 동안 살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포근하게 둘러싼 양구의 산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당과 멋진 작업실 겸 거주공간, 그리고 도자를 굽는 불가마까지, 도예가의 멋진 삶을 둘러보고 나니 이 자연을 다 가진 꽃님님이 부러워졌다. 나중에 여기에 놀러와서 마당에서 캠핑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백자마을에서 차로 20여분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인스타에 나온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는 정보에 우리는 뜨거운 열기를 식힐 요량으로 바로 출발했다. 양구도 이미 꽤나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위로 올라가다 보니 거의 DMZ 근처까지 간 느낌이었다. 가면 갈수록 도로를 달리는 차 한 대도 마주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계곡 근처에 도착해서 노지캠핑장에 들어서니 캠핑족들의 차가 가득 차 있었다. 도로에 차가 하나도 없던 모습과 대조되어 놀라웠다. 나도 캠핑을 한번 해봤지만 캠핑하는 사람들은 좋은 곳이라면 오지라도 잘 찾아다닌다. 차를 댈 자리가 없어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서 적당한 빈 자리를 찾아 세워두고 물놀이를 하러 내려갔다.
더위를 식혀주는 차디찬 온도, 적당히 허리 높이까지 오는 수심, 전방 1미터 정도까지 보이는 맑음, 그 안에서 헤엄치는 다양한 생물들까지. 두고두고 나만 알고 싶은 비밀의 계곡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북한이랑 가까운 탓에 박스모양의 지뢰가 떠내려올수도 있다는 말에 순간 섬뜩해졌다.
저녁에는 양구 읍내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터전을 마련하신 '나디'님의 집에 놀러 갔다. 빨간 벽돌로 만든 멋진 퍼머컬처식 밭이 한눈에 보였고, 먼저 놀러와있던 분들이 밭에서 토마토를 따먹고 있었다. 주택 관련 잡지에서 본 듯한 외국의 집이 바로 이 양구에 있었다.
나디님 가족은 20년 동안 이곳에 거주하며 밭을 조성하고, 작업공간을 만들고, 본채 아래에 별채까지 직접 건축에 참여하셨다고 한다. 시골에 살면 목수 다 된다고 하는 게 정말이다. 나디님의 딸인 현교님이 같은 PDC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아래에 있는 별채를 현교님이 개인 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 2평짜리 작은 방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았던 나에겐 어느새 큰 방은 부모님 방, 작은 방은 아이 방이라는 편견이 심어져 있었나보다. 사실 아이들은 커가면서 독립적인 아지트가 필요하다. 친구를 불러도, 조금 늦게 들어와도 참견하는 이 없는 자신만의 아지트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틀에 갇힐 필요가 없는 시골 주택의 삶은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내가 살게 될 집은 어떤 모습일까, 깊이 상상해 보게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