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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Jan 05. 2024

단식 셋째 날

예민함은 생존이다

요즘은 남편과 주 2회 새벽 수영을 다닌다. 일어나기도 힘든데, 눈 뜨자마자 배고픔을 부여잡고 공복에 수영을 하기란 더더욱 고역이었다. 하지만 한 달 정도 다녀보니 수영 후 이루 말할 수 없는 개운함에 중독이 된 것 같다. 여전히 아침마다 나와 싸우긴 하지만 그래도 수영을 간 날은 정말 뿌듯하다.


3일 차 아침, 수영을 가기 위해 일어났다. 어젯밤 잠에 들 때 몸에 힘이 너무 없어서, 수영을 당연히 못 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눈이 떠진 시각은 새벽 5시였다.


공복 수영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오늘도 약간 힘이 없을 뿐, 수영을 해냈다. 선생님이 바뀌고 나서 기존보다 더 강하게 수영을 시키는데, 그럼에도 해냈으니 이건 진짜 큰 성취라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수영장 물에는 소독을 위해 강한 화학물질이 들어간다. 수영만 하면 피부가 건조해지고 머리가 뻣뻣해지는 이유이다. 단식 기간에는 노폐물을 배출하려고 모든 땀구멍이 열린다. 그때 수영을 하거나 화학성분이 포함된 샴푸, 비누, 치약 등을 사용하면 몸이 따가워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아직 절식 기간이라 그런지 피부에 자극은 없었지만, 유독 물때 냄새가 심하게 났다. 로션과 비누도 이미 순하디 순한, '천연'이라고 하는--천연 성분이어도 모든 유통되는 제품에는 화학 첨가제가 들어간다--것들로 바꿔서 그런지 괜찮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감각에 예민했다. 후각, 청각, 시각, 촉각, 미각 모두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 나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모든 자극들에 긴장 상태로 살아왔던 것 같다.


술 냄새, 담배 냄새가 너무너무 싫었다. 담배 피우는 아빠가 술 마시고 들어오면 피했다. 큰 소리가 싫어서 풍선 터뜨리는 소리, 케익 폭죽 터뜨리는 소리도 무서워했다. 뻥튀기 차가 있으면 귀를 막고 지나갔다. 호기심에 가 봤던 클럽은 담배 냄새도 심하고 너무 시끄러워서 싫어졌다.


얼굴에는 여드름이 많아서 한창 외모에 신경 쓰던 학창 시절에는 좋다는 여드름용 화장품을 이것저것 많이도 써봤다. 얼굴에 따가우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아 참다가 얼굴 전체가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


MSG범벅인 음식만 먹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비건이 되고 나니 채소의 다양한 맛들이 입에서 향연을 부린다. 100가지 채소가 있다면 100가지 맛이 있다. 양념을, 조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백 가지 맛으로 늘어난다. 밭에서 바로 뽑아먹는 당근은 정말 달다. 이제는 육수에 고기가 들어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죽음이 연상되는 누린내와 비린내가 싫어졌다.


밭에서 뽑은 당근


요즘은 시각도 많이 예민해져서 스마트폰을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이 침침하고 건조해진다. 야간 운전도 자극적인 빛이 많아서 힘들다.


예민함은 과거에는 생존에 유리한 유전자였다고 한다. 야생에서 주변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 빠르게 대처해야 하고, 음식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할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현대 사회에 오면서 야생의 위협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예민한 능력은 그저 사회에서 적응을 잘 못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나는 예민함 덕분에 좀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예민함 덕분에 나에게 독이 되는 일을 빨리 정리할 수 있었다. 예민함 덕분에 나에게 독이 되는 음식들을 빨리 끊을 수 있었다. 예민함 덕분에 좋은 공기와 물과 흙이 있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


기후생태위기 시대이자 인류가 지질학적인 층을 바꿔버리는 인류세 시대이다. 기후는 점점 가혹해질 것이며, 재해가 농사를 망쳐버리는 빈도수가 늘어날 것이다. 먹거리는 점점 스마트팜이라는 공장에서 찍혀 나올 것이며, 건강한 토양은 농약과 비료로 점점 건조해질 것이다. 이 위기를 나는 매 순간 피부로 감각하고 있다. 건강한 흙을 만질 수 있음에 감사하고, 건강한 흙 속 미생물이 만들어낸 먹거리를 먹으며 내 몸을 유지시키는 미생물 군집을 건강하게 키워내고 있다. 기후생태위기 시대는 우리가 정복했다고 생각했던 야생의 역습을 당하는 시대이다.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이 생존에 유리해지는 시대이다.


예민한 나는 이미 자연식물식과 천연소재로 많은 것을 바꿔버려서 절식 기간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닐까? 내일부터 들어갈 본단식 기간에도 나를 섬세하게 관찰해 봐야겠다.




3일 차 아침


새벽 수영 후 아침은 7시 반, 죽 2/5 공기, 물김치국물.

그나마 위로가 됐던 된장국마저 빠져버리니 더욱 공허한 느낌이다. 오늘 이후로는 본단식에 들어가니 양을 줄이는 게 당연하지만 여전히 먹고픈 것 투성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미친 듯이 배고파서 이성을 잃은 모습을 상상했던 것과 달리 의외로 나 자신이 차분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토나 두통, 어지러움 등을 호소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너무나도 멀쩡하다. 배고픔을 상시 느껴야 한다는 것 빼고는.


공복감도 차차 적응이 되어가는 듯하다. 극심한 배고픔이 아니라 그냥 한 끼 굶은 정도의 배고픔이랄까. 눈앞에서 베이글을 맛있게 먹는 남편을 보고도 내 뱃속 상태는 차분했다. 오히려 공복에 들어간 죽 3/5 공기가 든든하게 느껴진다.


새벽 수영이 힘들었는지 다시 잠에 들었다. 1시간 반쯤 잤을까, 점심, 저녁으로 먹을 미음과 물김치국물을 싸들고 작업실에 갔다.

3일 차 점심

점심은 12시 반, 미음 3/5 공기, 물김치국물.

먹는 데 걸린 시간 1분. 이제 진짜 단식에 들어간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음식을 탐내지도 않고 매끼 챙겨 먹는 게 귀찮은 사람이라면 이거 할 만하겠다. 나는 '건강하지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보고, 지인들과 나누어 먹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라 그런 점은 참 아쉽다. 짧게 단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서 종종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5시, 미음 2/5 공기, 물김치국물.

이제는 뭘 먹는다는 느낌도 없다. 그냥 먹으라니까 먹는다. 저녁 미팅을 위해서 망원동 카페에 갔다. 다행히 내가 마실 수 있는 차가 있었다. 쑥차를 주문하고 앉아 동료들을 기다렸다.

비건글방 동료들과 근황 토크, 새해 다짐이나 계획 등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9시쯤 되니 어지럼증이 생길 것 같은 느낌과 피로감이 몰려온다. 운전에 지장이 생길까 봐 먼저 자리를 떴다.


집에서 죽염을 살짝 찍어먹었다. 어지러울 때 먹으라고 했는데,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

오늘부턴 마그밀이라는 변비약도 먹어야 한다. 자기 전에 5알을 먹었다. 내일부터 화장실에 자주 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가능하다고 해서 의아했다. 전단식 때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하니 부지런해야 한다. 외출이 잦다면 주변에 수없이 많은 먹거리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그 정도는 의지로 가능하니 단식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밖에서 설사는 하고 싶지 않은데... 살짝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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