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울적할 때는 화장을 하곤 해.

화장하고 설거지하는 여자

by 고요

마음이 울적해질 때는 화장을 한다. 전업주부이다 보니 집 안에서 거의 모든 일들이 행해진다.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화장을 굳이 할 일이 없다. 집에서 살림을 하는 중에, 짬짬이 읽고 싶은 것들, 쓰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으면 복권에 당첨된 듯 짜릿한 하루가 된다. 짜릿한 하루가 매일같이 지속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날들도 허다하다. 특히, 아이들의 방학 기간에는 더욱 그러하다.


종종 나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 같게 느껴진다. '이 세상에는 쓸모없는 아름다운 것들도 많아.'라고 애써 위로하며 나는 화장을 한다. "어머! 세상에! 전혀 몰라봤잖아. 안경만 벗어도 완전 딴 사람이네."라는 말을 듣는다. 화장을 하고, 안 하고 보다 안경을 쓰고 안 쓰고의 차이가 가장 크기에, 제일 먼저 렌즈를 눈 안에 넣는다. 안경이 사라진 나의 얼굴이 이내 낯설다. 나이가 들 수록 렌즈 낀 눈이 피곤해서 일부러라도 더 안경을 쓰곤 하지만, 유독 마음이 쓸쓸할 때만큼은 렌즈를 끼어 변신을 하고 싶어 진다.


아이라인을 진하고 길고 두껍게 빼서 칠한다. 쌍꺼풀이 없는 눈이라 아이라인을 그릴 때, 가장 큰 변화를 느낀다. 진한 검은색으로 최대한 쎄 보이는 눈을 만들어본다. 천상 "센 언니"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지라, 화장만큼은 "선한 눈"을 연출하기 싫을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엄마가 이런 화장을 하면, 당장 지우라고 성화다.) 눈을 한번 깜빡이며 눈의 아우트라인을 그날의 손길로 변신시킬 때, 조용히 내 안에 숨어 지내고 있던 좀 더 단단하고 자신감 있는 페르소나가 얼굴을 빼꼼 내민다. '안녕, 반가워. 평소에도 네가 나와주면 좋을 텐데...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 기뻐.'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아이섀도. 화장품을 소비하는 것이 유독 아까워 사지 않은 것을 증명하듯 유효기간이 몇십 년씩 지난 오래된 아이섀도 중에서 발색이 여전히 잘 되는 것을 고른다. 눈 두덩이를 캔버스 삼아 모험을 한다. 때로는 잔잔하게 어울리는 계통의 색으로, 때로는 정말 과감하게(또는 촌스럽게) 포인트를 주는 색으로 눈두덩이 캔버스에 정성을 들여 색을 칠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유효기간 지난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을 보고 환히 웃는다. 거울을 보고 웃는 나의 모습도 오랜만이고, 화장을 정성 들여 한 나의 모습도 오랜만이다. '괜찮아. 나는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쓸 수 있어 좋아. 꿈을 꾸고 있으니 괜찮아.' 하며 나 자신에게 말해준다. 가슴 안에 뜨거운 것들이 눈물샘까지 올라오기 전에 재빨리 사진을 한 장 남긴다. 비밀스럽게 나만 보기로 저장을 해놓는다. 오늘 날짜와 함께.


그러다 아이들이 돌아오면, "엄마, 오늘 정말 예쁘다." 하고 좋아해 주고 그런 사랑을 받으며, 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꿈을 꾸는 엄마는 죽기 전에 꼭 꿈을 이루겠다고 아이들에게 약속을 한다. 환히 웃으며, "엄마는 꿈을 꿀 수 있어서 행복해."하고 말하면서.


옷장에는 20년 된 옷들, 이제는 무슨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없기에, 운동복을 입을 때가 가장 나답고 편하다. 이렇게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운동복차림으로 고무장갑을 낀다. 쌓아놓은 그릇들을 이제 깨끗이 씻어야지! 힘이 난다. 불끈! 하는 마음으로, 고무장갑을 낀다. 마징가나 슈퍼맨의 마법의 주먹처럼, 이제 나는 슈퍼파워 고무장갑을 입었다. 천하무적이다.


아이들에게 "엄마, 설거지할 동안만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 좀 듣자~"하고 부탁을 하고, 볼륨을 크게 키운다.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처럼, 나의 노트북에는 여전히 임시 저장되어 완성되지 못한 글들이 몇십 개씩 쌓여있다. 백업하지 않아 쌩으로 잃어버린 싸이월드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천몇 개가 쌓여있다. 이제는 그 글들을 버려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버리지도 못하고 남기지도 못한 채, 접근이 되지 않는 싸이월드의 글들은 아쉬움으로 추억하며, 지금 꾸는 꿈이 허황된 꿈이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위로해본다. '언젠가는 이렇게 화장을 곱게 하고 꿈에 쓰일 사진 한 장을 찍을 날이 올 수도 있겠지.' 하며 설거지를 시작 한다. 그렇게 나의 손길이 닿은 곳에는 깨끗하게 반짝이는 그릇이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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