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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May 29. 2023

3억을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

  역전세로 3억을 잃었다. 사실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있기에 포기하며 무너질 수 없었다. ‘나 몰라라’하고 경매를 넘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추천을 받았지만 삶은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 영역에서 책임감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선택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엄마'라는 역할은 나에게 중요한 존재 이유 중 하나였다. 얕은 생각보다는 지혜롭고 떳떳한 해결 방법을 찾고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손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손실의 크기만 다를 뿐 손실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지’라고 마음을 먹은 순간, 스스로 바꿀 수 없는 환경에 대한 불평과 불만부터 깨끗하게 지우기로 했다. 대신 현실로 돌아와 수입과 지출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가장 복장이 터지는 것은 모아둔 돈이 이렇게나 없을까 싶은 것이다. 피부과 시술을 정기적으로 다니는 것도 아니고 명품을 하나씩 사 모으는 것도 아니었다. 특별히, 지나치게 지출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카드값으로 나간 돈을 합쳐보니 아깝고, 좀 안 마시고 좀 덜 먹었으면 좋았을 걸 싶었다.   

  ‘기본에 충실하라.’

  카드를 긁는 습관부터 고쳐 먹기로 했다. 고정 지출을 포함한 한 달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계획한 금액 안에서 우선 한 달을 살아보기로 했다. 지금 우리 집의 가계부는 기초 공사부터 부실이라 이 상황에서 저축을 얼마 하느냐는 다음 문제였다. 수입을 갑자기 늘릴 수 없으니 지출을 먼저 줄이고 관리하기로 했다.


  중학생인 아이에게도 학원을 보내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수업 시간에 잘 듣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꼭 선생님께 여쭤보며 끝까지 알고 넘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처음에는 스스로 공부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정말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더 잘할 거라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더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기분이 어땠을까? 아이는 매일 밤 몰래 울던 엄마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멍하게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기분을 헤아려보니 ‘아이가 무슨 죄’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국 자식에게는 더 나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애썼지만 아직은 더 나은 것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삶이 점점 더 좋아질 거라는 생각만 할 줄 알았던 나는 지금에 와서야 인내심을 길러주고, 끈기를 가르쳐야 했다며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보다 없는 일이 많아진 것 같은 지금, 뭔가 낯설지 않은 감정이 내 마음을 포갠다. 바로 부모님의 삶이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두 분이 고생해서 살면 ‘내 자식은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고 계신다. 생일마다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며, 온몸이 쑤시게 일해서 번 돈을 보내주신다.

  “무지개인간아, 엄마 아빠는 줄 수 있어서 기쁘다.”

  ‘그게 뭐가 기쁜 일일까 고생만 된통 하면서...’

  하지만 이제야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비록 삶이 고(苦)의 연속이더라도 자식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기쁨과 자식의 웃는 모습 하나면 세상의 만병이 씻겨 내려간다는 것을. 반대로 수화기 너머 들리는 자식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기운이 없어 보이면 부모님은 왠지 모를 미안함과 더 큰 세상의 무게를 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나약해졌지만 그저 잘 자라주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래, 살아보자. 다시 시작해 보자!'라고 힘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의 모습은 그 어떤 위로보다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이제야 부모님의 삶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자리에 선 지금,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시간이 왔다. 부모님의 사랑으로 채워준, 부모님과 닮은 삶을 나만의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진짜 독립을 마흔에 시작한다. 결국 실패는 매정하지만 나는 기꺼이 친절한 선물로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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