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약금 삼천만 원을 부담해 주실 수 있나요?
세입자는 살고 있는 전셋집-그러니까 문제의 역전세를 맞은 그 집-을 매입하기로 결정을 한 뒤 이사를 가려고 했던 집의 가계약금을 줄 수 있는지 나에게 친절하게 물어보았다. 구두로 전세 계약의 재연장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밝혔고 이사 계획까지 이야기를 한 뒤 가계약을 했으니 자신이 가계약금 3천만 원을 날리는 것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야기도 함께 말이다. 그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집을 정리하는 편이 나았고 마침 이 집의 새 주인이, 취향에 맞게 리모델링해서 살던 세입자라면 꽤 괜찮은 흐름이었다. 정리를 하자면 집을 매수할 좋은 상대방이 나타났지만 그는 전세보증금을 못 받은 세입자였고, 전세권 설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틀 전에 알고는 깜짝 놀라 마음을 바꾼 경우였다. 그가 세입자이든 매수인이든, 어쨌든 나는 그와의 통화에서 늘 목소리가 작아지는 죄인이 되었다.
세입자의 말대로 그가 삼천만 원을 잃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 돈은 한 푼이라도 아쉬운 나에게는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돈이었고, 말을 꺼낸 세입자에게도 그다지 유쾌한 돈은 아닐 것이다. 어깨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내가 책임을 지기로 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듣다 보니 지역마다 부동산 문화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어느 지역에서나 공통적으로 적용될 것 같은 부분을 글로 적어 보기로 했다.
보통 부동산 매매(전세) 계약을 할 때는 계약서를 쓰기 전에 서로의 계약 의사를 확인하고 거래가 성립되었다는 ‘약속’의 의미로 거래 금액의 10%를 가계약금으로 매수인(세입자)이 매도인(집주인)에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도 살면서 몇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 계약서를 쓸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처럼 가계약의 효력이 어디까지일까 따져야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아직 계약서에 사인을 하거나 도장을 찍기 전이었고, 잔금도 치르기 전이니 '가계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경우가 발생했을 때 판단하기 애매한 상황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애매하게 끝나는 '큰 일'은 어디에도 없다. 큰 일일수록 결론은 아주 선명하게 갈라진다.
세입자가 이사를 가려고 계약해 놓은 집의 집주인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 '아이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자, 여기 삼천만 원입니다. 얼른 가져가세요.'라고 말하며 돌려주신다면 어쩌면 더 쉽게 일이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천상계가 아니다. 그 주인은 가계약금으로 받은 삼천만 원을 절대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두 번 다시 말도 꺼내지 말아 달라는 단호한 부탁도 덧붙이며 말이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확고한 마음에 동요가 일고, 좋은 마음이 들어 사정을 딱하게 여기지는 않을까 기대를 하며 “만약에 그분이 가계약금을 돌려주시면 꼭 저에게도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 보는 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최선이 늘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었다. 말이라도 해봤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살면서 만나야 할 불운과 괴로움이 잇따라 쌓이며 실패한 퇴적암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사정은 딱했다. 물론 또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삶에는 원리와 원칙이 존재하고, 논란이 생길 때마다 그리고 사태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가슴은 쓰리지만 경험은 실패한 퇴적암을 다른 성질의 변성암으로 변하며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제 이번에 배운 두 가지 부동산 상식은 적어보기로 한다.
1. 세입자(B)가 이사를 하려고 했던 집의 주인(C)은 가계약금 반환 의무가 있을까?
- 집주인(C)에게는 반드시 가계약금을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가 없다고 한다. 게다가 이번의 경우 가계약금인 삼천만 원을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공인중개사마다 이견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세입자(B)가 이사를 할 집의 주인(C)과 가계약을 한 시점부터 계약 파기까지 열흘 정도의 기간이 있었기에 내가(A) 책임을 지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2. 그럼 가계약의 체결은 어느 시점부터일까?
- 앞으로 공인중개사를 통해 부동산 계약을 할 때 가계약금 이체 계좌번호를 받고 가계약금을 보낸 뒤에는 꼭 공인중개사의 확인 문자를 받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ㅇ월 ㅇㅇ일 ★님 계좌에 가계약금 X원 입금 확인되었습니다.’라는 형식의 확정 문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이 문자는 양방의 계약 체결 의사를 포함한 가계약의 성립을 확정 짓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이 짧은 문자가 '계약의 성립'이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세입자의 이사 갈 집에 대한 계약은 정당하게 이루어졌고, 정당하게 받은 가계약금은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법무사의 의견을 받았다.) 요즘은 워낙 잘 챙겨 주시는 공인중개사도 많지만 그동안 나는 이런 부분을 꼼꼼하게 챙겼는지 안 챙겼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계약의 체결을 알리는 문자인지도 모르고!
역시 산전수전 다 겪고 볼 일이다. 하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