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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Nov 25. 2023

제 소원은 곱게 늙는 게 아닙니다

김영철, <울다가 웃었다>

  저는 아주 찰지게 욕을 하는 욕쟁이 할매로 늙고 싶습니다.


  제 삶은 대체적으로 곱습니다. 살면서 겪은 경험으로 따지자면 시트콤과 막장 드라마를 넘나들기도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로만 삶을 평가한다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 따뜻하고 고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예를 들어 보자면 길을 걷다가

 

도를 아십니까?

  

  라고 묻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많이 온다는 보이스피싱 전화도 받아 본 적이 없고요. <정글북>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인생의 비밀은 단 한 가지.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도 너를 대한다는 것이다."라고 썼다지요. 그의 편지에 비추어 본다면 세상이 저를 대하는 방식은 온실 속 화초인지 잡초인지 모르겠지만 따스운 마음을 자주 보여줍니다. 물론 앞의 두 사례만으로 삶이 곱다고 단정 짓는 게 타당한 지는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세상은 저를 곱게 키우고 있다는 판단에 한 표를 보냅니다. 그러니 저도 세상을 당연히 곱게 대해야 하지요.


  어떻게요? 입에는 예쁜 말을 담고 눈을 맞추는 세상 속의 모든 것-사람, 사물, 자연-에 고운 말들을 건네야지요. 행여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날에는 눈에 미소를 담고 인사를 보내는 것이 유리 온실을 만들어 지켜주고 있는 세상에 대한 답례이고요. 혹여 세상이 저를 아래에는 힘찬 폭포수가 떨어지는 낭떠러지 앞에 세우거나 벗어나려고 애쓰면 더 푹푹 빠지는 진흙 벌에 빠뜨렸다 했을지라도, 이제는 나이가 들고 내면이 익어가고 있기에 '어제보다 나은 사람으로 세상에 남고 싶다'라며 제가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 용기도 있지요. 이제는 제가 먼저 대접받고 싶은 방식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어쨌든 저는 부족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삶이 이끄는 방향은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세상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김영철 <울다가 웃었다> @무지개인간


  지난 시월에는 코디미언 김영철 님의 북토크에 다녀왔어요. 영어를 잘하는 연예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깊고 넓은 진지한 모습이 많이 보였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사는 그가 멋있어 보이면서 안타깝기도 했어요. (제 모습이 보여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기도 했거든요.)

  북토크에 다녀온 뒤에 작가 김영철 님이 쓴 <울다가 웃었다>를 읽었어요. 책은 별도로 자동 음성 지원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았지만 읽다 보면 자동 음성 지원이 되어 참 신기했어요. <울다가 웃었다>에서 만난 작가 김영철은 저와 좋아하는 책과 작가의 취향이 비슷하고 닮은 경험이 많아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어요. 에세이의 매력은 책을 너머 글을 쓴 작가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에 문이 열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느낌을 경험을 했어요.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졌거든요.


김영철 <울다가 웃었다> @무지개인간


  앞으로 1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내적으로 성장한 내가 기대된다. 그리고 여전히 꿈꾸고 있기를 바란다. 꿈꾸는 자는 언제나 젊고, 꿈을 상실한 자는 늙어가는 거니까. 내가 꿈을 이뤘다면 다른 이가 꿈을 꿀 수 있도록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2032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책을 읽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깊게 생각하게 되는 문장은 이 부분입니다. 책을 읽어보셨다면 분명 김영철 작가가 책 속 문장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의 10년 뒤 나이인 예순, 저는 그 나이가 되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참 궁금해졌어요. 미래를 그려보는 생각은 할 때마다 내용이 바뀌었지만 문득 인생에서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건 한 번 해보고 싶군'이라고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욕을 해보는 것입니다. 욕을 아주 찰지게, 맛깔나게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단 하루만이라도 말이죠.

  세상이 보여주는 고운 것들과 어울려 살면서 사나운 일이 생겼을 때 뱉어본 가장 심한 욕은 AC와 IC입니다. 여기에다가 '툭' 끊김이 없이 리듬감 있게 숫자 '8'을 잘 붙이면 참으로 맛있는 욕이 될 것 같은데, 그게 안 됩니다. 미치겠어요! 남몰래 연습을 해보지만 '데크레센도'(점점 여리게)나 '스타카토'(짧게 끊어친다)가 됩니다. 물 흐르듯, 욕을 뱉은 듯 안 뱉은 듯 알 수 없는, 조용하고 매끄럽게 연결되는 자연스러움이 없어요.


  왜 하필 욕을 잘하고 싶을까요? 오래전 한 강의에서 요즘은 '기억장애증' 또는 '인지 장애증'으로 불리는 치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살면서 억눌렀던 감정이 치매가 왔을 때 더 증폭되어 나온다는 '썰(說)'을 풀며 툭하면 참으며 한(恨) 많은 삶을 견뎌내기보다 감정을 알아차리고 풀어주며 나를 돌보라는 유익한 강의였지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사는 사람이라...'

  그 순간 두려운 마음이 몰려왔어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던 먼 미래에 이미 저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욕쟁이 할머니가 되어 있었죠. 흔히 사춘기에게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하는데, 인생에도 총량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나를 잊는 순간에 폭발하는 것이 두려워 그 뒤로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이렇게 글로도 쓰며 드러내나 봅니다. 그런데 여전히 걱정이 됩니다. 혹시나 응어리 진 게 덜 풀렸을까 봐. 그래서 예순 쯤에는 욕을 잘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었답니다.


  공자는 예순을 '이순(耳順)'이라고 하여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욕쟁이 할매가 되고 싶은 꿈은 '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는 순한 귀로 있는 그대로 듣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을 꾸는 것이겠죠.

  김영철 작가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누고 싶어 내적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꿈과 'A와 C' 뒤에 '8'자를 예쁘게 붙여 불편한 감정들을 잘 소각해 잊어버리고 싶은 저의 꿈, 우리의 꿈은 이루어질까요? 찰지게 욕을 날렸는데도 앙금이 남아있다면 그때는 다시 책을 펼쳐 그의 긍정 에너지를 좀 받아와야겠습니다.


  "세상아, 난 살고 있어 늘 고마워. 예순에는 내가 욕 좀 뱉어볼게. 네가 미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내가 잘 살고 싶어서 그래.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는구나!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욕을 잘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 지 삼 년쯤 되니 저도 무언가를 이루긴 했습니다. <울다가 웃었다> 북토크에서 행운의 선물로 받은 제주 허벅주를 꿀떡꿀떡 마시고는 '욕 커밍아웃'을 했다고 합니다. 예순이 되기도 전에 해내다니!

  

  다음은 현장에 있던 목격자의 진술입니다.


  그날... “언니는 욕 할 줄 알아요?"라고 묻더니 "C... e...... 8!"이라고 하고 갔어요.


  간절히 바라는 일은 이렇게도 이루어지는군요.

  (목적지를 변경합니다)"저는 마음이 밝고 너그러운 곱게 늙은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제목 배경 일러스트: Rachel Gr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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