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몬순

제24장 Black Swan(검은 백조)

by 만달

2020년 5월 16일

인도, 히마찰프라데시주(Himachal Pradesh), 다람살라(Daramshala)



‘난, 언제나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난 왜, 오늘도 이곳에 있는 건가?’

‘나, 정말 어떻게 되는 건가?’

‘이렇게, 끝인가?’

한 평 반의 독방 안에서 난 여전히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람살라 경찰서의 유치장을 나온 후 이곳 서브제일(Sub Jail)로 후송되던 날 오전, 프리양카가 판사의 사무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계단 복도에서 나를 감시하던 두 명의 경찰들은 나 못지않게 그 시간을 지루해했고 결국 우리 셋은 더러운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으니 난 그때까지만 해도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포근한 아침햇살에 반쯤 녹아 있었을 것이다. “Have you ever had sex with a white girl?”(백인이랑 해봤어?) 그중 축 처진 배와 축 늘어진 볼을 한 늙은 경찰이 특유의 표정으로 물었다. “Yes”(네.) 판사의 메이드가 가져다준 짜이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답했다. “What about a black girl? African girls, too?”(그럼 흑인 하고는? 아프리카 여자 말이야.) 우리 셋 중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고개를 깊게 숙이고 서둘러 계단을 오르는 메이드(maid)의 뒷모습, 그녀의 엉덩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늙고 뚱뚱한 경찰이 다시 물었다. “Yes I have,”(해봤어요.) 한 손에 들고 있던, 버터가 발려있지 않은 질기고 맛없는 식빵 한 조각을 물어뜯으며 나지막하게 소리 낼 때는 나 역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입속에서 오물거리는 질긴 식빵 덕분에 나의 소리가 더욱 성의 없이 들리기를 바랐다. “Wow! you are a lucky man. Tell me what’s the color of their pussies?”(이 자식 완전 행운의 사나이구만? 말해봐. 걔네들 거기 무슨 색이야?)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리를 꼬고 계단 난간에 기대어 연신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보다 덜 늙은 듯한 그의 동료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의 눈을 응시하며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Blackpink.”(블랙핑크). “Whites, blacks, Koreans and Indians. no matter what.”(백인, 흑인, 한국인, 인디언. 다 똑같죠.) 세 개의 비워진 짜이잔이 올려진 쟁반을 가져가기 위해 레몬색 얇은 펀자비 드레스 위에 톤이 짙은 노란색 숄을 걸친 판사의 메이드가 조금 전과 같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었다. 빈 찻잔과 접시를 가져가려는 것이다. 그녀를 본 두 명의 경찰 모두 서둘러 고개를 숙였고 얼굴이 발개진 그들은 그저 핸드폰만 만지작거릴 뿐이다.

“How many days am I going to stay there?”(저 그곳에서 얼마나 지내게 되는 겁니까?) 다시 그들의 지프를 타고 다람살라 경찰서로 돌아온 후 5월의 따스한 햇빛이 가득한 마당 위에서 내가 그렇게 묻자 약 두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했던 그 늙은 경찰은 주저함이 없이 판사로부터 하달받은 듯한 명령서를 적극적으로 훑었다. “Seven days.”(7일.) 그렇게 답한 그의 속도와 태도는 즉각적으로 그의 말에 무게를 실어 나에게 전달되었다. “Seven days? No, shit, it’s a mere non-sense. It’s like fucking ‘forever’.”(7일요? 어이없네, 완전히 말도 안 돼. 7일이면 ‘영원히’란 말이잖아요.) 난 너무 실망한 채 그렇게 투덜거렸다.

여덟 번째 날이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Seven days.”(7일.)라고 자신 있게 말한 그 경찰은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걸까? 그가 법원의 명령서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그는 분명히 그가 본 것을 믿었고 난 그가 말한 것을 믿었지만, 일곱 번째 날이었던 어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난 오늘도 여전히 이곳에 있다.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또 '생각'을 해야 한다. 영리하게 생각해서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스스로 설득할만한 논리를 지닌 가능성을 찾아내야만 당장 오늘 밤 잠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면 창조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너무 힘들어진다. ‘그가 법원의 명령서에서 본 것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내가 이곳에서 지내게 될 시간이 7일이라고 믿게 한 것인가?

그가 법원 명령서에서 본 것이 ‘Seven days’ 또는 ‘7 days’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유추에는 일리가 있다. 검찰과 경찰 사이에 주고받는 명령서가 그 정도로 친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대신 그가 서류에서 발견한 것은 어떤 특정한 날짜일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서 ’9.5.2020.~x.5.2020.’ 또는 ’(by, on, until…) x.May. 2020.’ 등 형식의 날짜. 그 날짜를 본 그 경찰은 재빨리 계산했을 것이다. ’x-9=7’ 결과가 7이 되기 위해서는 변수 x는 15가 아닌 16이 되어야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경찰은 내가 이곳으로 이송된 당일을 'Day 1'이 아닌 'Day 0'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변태새끼.” 혼자 중얼거리며 난 빠르고 요란하게 돌아가는 실링 팬을 바라보고 다시 누웠다. 오후 짜이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오후 한 시 반이 채 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오늘, 나에게 손님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한 평 반의 독방을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콘크리트 벽면에는 총 여덟 장의 힌디 신문지들이 너덜너덜하게 붙어있다. 원래는 더 많은 신문지가 벽면 전체를 덮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문지들은 여덟 장뿐이다. 벽면 이곳저곳에 묻어있는 수상한 노란 얼룩들은 다름 아닌 이미 벽에서 떨어져 나간 신문지들이 남긴 오래된 풀의 흔적임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5월 23일, 5월 28일, 6월 5일 모두 일 년 전인 2019년도의 발행물들이다. 오늘이 5월 16일이니 정확히 일주일 후부터는 그 신문들이 차례대로 첫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떨어져 나가 버린 다른 신문지들과는 달리 일 년이란 긴 시간 동안 꿋꿋이 한 자리를 지켰으니 나름대로 기념할 이유가 되겠군.’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에 난 이미 이곳을 벗어났을 테니 안타깝지만 너희들의 생일을 함께 축하할 일은 없겠네.’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티타늄 소재의 티아라를 쓴 그녀의 긴 생머리는 마치 Black swan(검은 백조)의 날개처럼 화려하게 펼쳐 있다. 가늘고 하얀 목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게 되면 너무 크지 않은 봉긋한 가슴 사이의 골에 빠진다. 그녀의 상반신을 가득 담고 있는 은빛 드레스는 매끈한 허리 밑에서 우아하게 펄럭인다. 정확히 그녀의 중심에서 갈라진 은빛 드레스의 틈 사이로 뻗어 나오는 두 개의 하얀 허벅지는 물방울처럼 한참을 흐르고 그녀의 작은 무릎 아래에서 서로 교차하기 시작한 곧고 날렵한 종아리로 이어지며, 투명하게 반짝이는 굽이 높은 샌들 속,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벨벳보다 더 부드럽고 고운 발목에 이른다. ‘인형인가?’ 의심해 보지만 수십 번을 쳐다봐도 단 한 장의 사진만으로는 도대체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한 평 반의 이 공간에서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10cm X 5cm의 공간이다.
‘인형인가?’


탕! 탕! 언제부터인지 철장문 앞에 서 있던 교도관이 짧지만 묵직한 검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Manwoo Choi? Is that right?”(이름, 최만우 맞죠?) 얼굴이 낯선 그는, 물론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Yes I am.”(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왼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한! 지!” 오른손을 곧게 펼쳐 거수경례한다. 동시에 그의 장화 뒷굽이 다른 한쪽의 그것에 절도 있게 부딪힌다. ‘탁!’ 소리가 났다. “한지.” 내가 듣기에는 거수경례할 때와 같은 소리로 들리지만 억양이 같지 않다. “한지! 한지?...” 거수경례 때와는 달리 낮고 차분하고 조용하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스마트폰 속의 화면을 향해 계속 ‘한지! 한지? 한지!’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 모든 일은 아무런 경고 없이 시작되었다. 그가 철장문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신문지 속 여자의 컬러 사진을 바라보며 ‘인형인가?’ 의심했던 자는 내가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갑자기 그는 휙 하고 뒤로 돌더니 스마트폰의 전면카메라로 나를 조준했다. 그 화면 속에는 어디에선가 본 것만 같은 중년 여자의 커다란 얼굴이 있었다. 초록색 사리 위에 버건디색 숄을 올린 화면 속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고 할 때 스마트폰이 다시 휙~하며 돌아 나 대신 철장문 앞의 교도관을 향했다. “한! 지!” 그는 다시 한번 힘 있게 목소리 내어 화면 속 그녀에게 거수경례했다. 동시에 ‘탁!’ 그의 장화 역시 소리 내었다. “28th, your next hearing will be on 28th.”(28일, 너의 다음 '경청'일은 28일이다.) 그리고 그는 마치 무엇인가에 쫓기 듯 서둘러 철장문 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스마트폰 화면 속 그녀 얼굴, 짙은 두 눈썹 사이에 박혀있던 500원짜리 동전만 한 빨간 빈디는 그가 떠난 이후에도 머릿속에서 한참 동안 잔상으로 '박힌'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태양을 응시한 후 남는 잔상처럼. 28일? 정신이 들었고 벽에 붙은 2019년 5월 28일 자 신문을 바라보았다. 1면인 신문지의 중앙에는 신문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힌디어로 인쇄되어 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인지하지 못했던 작은 코너를 발견한다. 이 방 벽에 붙어있는 모든 신문은 순수 힌디어로만 인쇄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렇게 발견한 그 작은 박스코너에는 'SMS'라는 제목과 함께 꼭 한 문장만이 쓰여있었다.


‘Sometimes you need to give up on people not because you don’t care but because they don’t’
(가끔은 당신이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당신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인연을 포기해야 하기도 한다.)


한 평 반 독방 안에 갇힌 지 이미 8일째지만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해 무섭고 두려운 수감자에게, 평범한 그 메시지는 날카로운 작두와도 같다. 아프지만 나는 왠지 그 문장을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어야만 했다. ’ 짜이!'

짜이가 도착했다.


오후 한 시 반.
이곳에서 여덟 번째 날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