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상에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수술을 했습니다.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암일지도 모른다고해서 한 수술이라 그런지 막상 당일에는 마음이 많이 먹먹했습니다. 개원가의 의사들이 다 그렇듯이 수술하고 채 일주일이 안된 오늘 출근을 했지요.
어제는 마음이 여러모로 착잡했습니다. 지난 주 내내 생각했던, 좀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세웠던 계획과, 다가올 겨울을 위해 해야하는 준비들, 그리고 드디어 코로나 19의 전염병 등급이 4등급으로 전환됨에 따라 검사 및 진료에 대한 지원내용이 바뀐다는 것 등, 이것저것 준비해야할 것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아침에, 옷을 갈아입고, 수술부위를 드레싱하고 거울 앞에서 오랜만에 단장도 해봅니다. 자, 이제 일주일을 쉬었던 일상이 시작된다!
진료시작 15분전, 자주오던 어린 남매가 들어왔어요. 준이와 린이는 엄마랑 주로 오지만 가끔 인자한 웃음을 가지신 할아버지와 따뜻해보이시는 할머니와도 옵니다. 오늘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온 날이었어요.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을 주체못하고 웃음을 지어보이니, 아이도 덩달아 열려 있는 진료실 앞에 서성거립니다.
"준이 많이 아팠어?" 하고 묻자 어색하면서도 담담한 얼굴로 "저는 비염인데요, 린이가 열이났어요." 라고 합니다.
여섯살짜리 오빠는 다정하게 동생이 왜 병원에 왔는지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준이, 린이 차례로 진찰을 마치고 나니 그 어색한 웃음을 하던 준이는 손등을 위로 올리고 도장을 찍어달라며 제게 다가옵니다.
저는 도장 선생님이거든요. 진료를 잘 마치고 나면 손등에 뽀로로 도장을 찍어줍니다.
동생 린이는 생각보다 기침이 심해서 3일뒤 다시 뵙기로 하고 진료를 마쳤습니다.
아인이 엄마는 겁이 많으셨어요. 침대에서 쿵 하고 떨어졌다고 맨발로 병원을 오실 정도였지요. 스티커라도 한장 안보이는 날에는 혹시 뱃속에 들어간건 아닌지 물으러 오시기도 하셨습니다. 감기가 있을땐 열이 떨어질때까지 거의 매일 오셨어요. 그러던 아인이가 거의 3개월만에 병원에 왔습니다.키가 부쩍컸습니다. 최근엔 감기도 없었는데, 어제부터 콧물이 나더니 오늘 아침부터 열이 났다고 합니다. 엄마도 이제 두돌이 거의 다된 아인이 만큼이나 마음이 담대해지셔서 이정도엔 끄떡없이 다음에 뵙기로 하고 진료를 마쳤어요.
지효는 오빠랑 두살 터울이 납니다. 오빠도 매우 의젓하지만, 지효는 아직 이제 20개월이지요. 아장아장 걸어오는 것도 너무 예쁜데, 이 친구는 15개월쯤 부터 혼자 진료를 보았습니다.
"지효 기침했어?"하고 물어보면 "응"이라고 대답도 해줍니다. 심지어 오빠만 아픈날엔 자기도 진료를 보고 도장을 받아야하니 의자에 앉히라 떼를 쓰던 친구였어요. 그런데 그런 지효가 오늘은 의자에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지난번 진료때 코를 뺐던것이 많이 불편했나봐요. "코 안뺼께~~"를 한 다섯번 정도 말하고 나서야 겨우 의자에 앉아 하나, 둘, 셋 원래 하던 순서대로 진료를 합니다. 심지어 지난번에 귀지를 빼고 나서는 시원했다고 얘기해주기도 한다며 엄마가 신기해하십니다. 하지만, 콧물은 빼고 싶지 않았던 발이 너무 귀여운 우리 지효입니다.
승이는 5개월쯤 아빠랑 놀다가 침대에서 떨어진이후로는 배밀이를 안하려던 친구였어요. 배밀이도 안하는 아이가 잡고 서있으니 이상해서 상담을 하다보니, 떨어진 일을 기억해서인지, 위험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오늘은 승이가 12개월 접종을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잡고 서기만 4개월째 아직 걸으려 안하는 이 친구의 입이 바쁩니다. 주변에 요구사항은 많은데, 전달할 방법이 없으니 화를 내기도 하고, 뭐라고 뭐라고 바쁜 소리를 내며 꾸짖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한살정도 많은 형아에게 다가가 "아가"라고 말해주었다고 하네요.
성인에서보다 아이에서는 타고난 기질이 더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친구는 위험회피도 높고 주변사람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 높았던 아이인것 같아요.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자극 추구도 높고요. 신기하거나 재미있는 것을 보면 돌진합니다. 엄마는 낯을 많이 가려 걱정이라고 어린이집을 보내기로 했지만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 하셨지만, 제가 보기엔 승이, 엄청 잘할 것 같아요. 그리고 왠지 말도 조금 늦을 것같지만, 뛰게되든, 말을 하든 한번 시작하면 정말 엄청날 것 같습니다.
혁이는 얼마전 24개월 영유아 건강검진을 하면서 언어지연이 의심되어 스크리닝 검사를 했던 친구였어요. 사실, 15개월 이후의 아이들의 눈을 보면 이 아이와 소통이 된다 안된다는 어느정도 알 수 있지요. 대답은 못하더라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있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기 때문에 그 친구들과는 친해지기가 쉬워요. 혁이도 그런 아이였어요. 한번도 진료실에서 의사소통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언어가 늦다는 말에 깜짝 놀랐지요. 스크리닝 검사를 했는데, 수용언어는 다소 늦었지만 정상 범위에 있었고, 표현언어중에서도 단어가 좀 늦었어요. 그리고 발달검사에서는 세상에 자조, 대근육, 소근육 운동이 높은거에요. 검사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아마 말하기 귀찮아서 (?) 혼자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께 행동을 읽어주고 단어를 따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도록 설명 드렸어요. 그리고 2주나 지났을까 오늘 왔는데, 아직 정확한 발음은 아니지만 "감사합니다. 선생님"까지 하고 갔어요. 아이들은 정말 신비로운 존재죠. 보석같은 아이들의 능력을 갑자기 세상에 촤르르 펴놓는 날이 있어요. 그런 날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저는 매우 행운아인 것 같아요.
수술을 해서 목소리도 잘 안나오고, 그래서 소통이 힘들었어요. 진찰 후 아이들이 우는 경우가 많아서 설명할때 제 목소리가 아이 울음소리를 이기지 못하더라고요. 그래도 설명 잘 들어주신 보호자분들 오늘 너무 감사합니다.
진료 시작 전까지, 오늘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진료 시작하고 10분만에 알았어요. 제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아이는 마을이 키웁니다. 저는 동구 한켠에 작은 나무 처럼 이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복받은 삶인지 감사하며 이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