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 관한 글쓰기 7
결혼 후 처음 시댁에 가서 부엌일을 돕는데 당황했다. 같은 요리인데 만드는 과정이 달랐다. 양념을 두는 위치나 조리도구를 보관하는 법도 낯설었다. 위생백에 음식을 담을 때, 나는 되도록 풀기 쉽게 묶는데 시어머니는 꽁꽁 묶었다. 밥 안칠 쌀을 몇 번 더 씻으려 하면, 어머님은 이만하면 괜찮다고 하셨다. 집마다 다양한 살림의 방식이 있음을 그제야 실감했다.
그전까지 내가 경험했던 살림은 모두 엄마의 방식이었다. 엄마는 쌀을 건네며 하얀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씻으라고 당부했다. 나는 쌀이란 꼭 헹굼 물이 맑아질 때까지 씻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엄마는 비닐이나 끈을 묶을 때도 다음에 풀기 쉽게 매듭지어야 한다고 했다.
몇 가지는 지켜보는 것만으로 답습되었다. 가스레인지 바로 밑에 둘 양념과 냉장고에 넣어 둘 양념의 구분, 다 된 밥을 푸고 담는 법, 어떤 식재료로 무슨 요리를 하는지 등. 엄마는 밭에서 감자가 나면 고춧가루를 넣고 매콤하게 조린 ‘북감자조림’을 해주었다. 가지는 무조건 삶은 뒤 간장과 참기름에 자작하게 버무린 ‘가지무름’으로만 먹었다. 세상엔 무수히 많은 감자와 가지 조리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엄마가 해 주던 요리다.
지난 글에 물건을 껴안고 사는 엄마에 대해 마치 남 일인 양 썼지만,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버리기 아까워 모아 둔 쇼핑백이 수십 개다. 집에도 두고 회사에도 둔다. 회사 동료가 그런 나를 보고 '뭐야, 우리 엄마 같아'라고 한 걸 보면 엄마들은 대부분 비슷한가 보다. 하지만 쇼핑백은 내 서랍에만 있고 동료에게는 ‘엄마 같은’ 구석이 없었다. 담을 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쇼핑백을 내밀며 뿌듯해하는 나 같은 자녀만이 ‘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다’는 엄마의 논리에 수긍하며 앞으로도 엄마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살면서 달걀 같은 것들이 떨어지기 전에 항상 미리 채워 놓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엄마. 그 얘길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 또한 마트가 지천인 서울에서도 샴푸나 치약 같은 생필품은 늘 재고를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
엄마는 남의 손이 자신만 못하다는 생각에 본인과 가족을 피곤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아빠가 논두렁을 정비하면 못 미더워하며 기어이 삽을 들고 가 다시 다졌다. 멀리 사는 나에게는 ‘택배로 고구마를 부쳤으니 쪄 먹어라’하면 될 것을, ‘물을 받아라, 고구마를 씻어라, 팔팔 끓으면 불을 줄여라, 불을 끄고 뚜껑을 열어라’ 등등 한낱 고구마 찌는 것도 열 단계에 걸쳐 설명하곤 했다. 장황한 잔소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런데 나도 결혼해서 신랑한테 비슷한 행동을 했나 보다. 어느 날 신랑이 ‘한 번만 말해도 알아들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라고 말했을 때 부끄러운 동시에 절망스러웠다. 엄마처럼 굴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대할 때도 그랬다. ‘일찍 퇴근하면 뭐해? 할 일도 없는데 일이나 해’라고 생각하며 나를 회사에 앉혀 놓았다. 휴식을 ‘할 일’ 목록에 넣는 법을 몰랐다. 인생의 재미라고는 없어 보이는, 일 밖에 모르는 엄마를 보며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새 나는 내가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이 돼 있었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한 엄마가 인생의 이런저런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을 보고 딸이 그대로 배워 행한다는 얘기다. 대체 딸과 엄마는 무슨 사이기에 저런 속설까지 있는걸까. 두 단어를 나란히 검색하면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엄마와 딸의 심리학’,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등등 모녀 관계의 애착과 심리적 문제를 다룬 수많은 책이 나온다. 지나치게 사랑하고, 지나치게 미워하는 엄마와 딸의 서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사한가 보다.
그래서인지 딸은 자존감마저 엄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어릴 때 숫기가 없고 내성적이었는데, 엄마는 그런 나에게 ‘짜잔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잔칫집에 와서 밥 한 그릇 뚝딱 먹고 가는 애들도 있는데 너는 왜 이렇게 짜잔하냐고 했다. 툭하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나를 보고 그렇게 물러 빠져서 어떻게 살 거냐고 했다. 끈기가 부족하고, ‘어린냥’이 찍찍 흐른다고도 했다. 심지어 내 손가락이 길어서 게으를 상이라 했다. 엄마의 평가는 내 무의식 안에 고스란히 남아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됐다.
그냥저냥 쉰 날에는 내가 게으르기 때문에 시간을 허비했다고 자책했다. 회사를 그만 둘 때마다 엄마 말대로 나는 끈기가 없고 독하지 못한 애 같았다. 그렇다면 나 같은 건 이 험한 세상 그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날도 많았다. 엄마는 내가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기 좋은 언어를 물려주었다.
물론 나보다 먼저 짜잔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스무 살의 엄마다. 친척 소개로 광주 방직공장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출근 전날 기숙사에서 하루 자고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집에 가겠다고 했단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고 일도 못할 것만 같은 마음에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 왔다. 이 얘길 들려주며 엄마는 자신에게도 ‘내가 못나고 짜잔해서 그렇다’고 했다. 광대가 도드라진 얼굴에 작은 눈, 까만 피부를 가진 젊은 날의 엄마. 나는 어쩌다 엄마 얼굴 뿐 아니라 부정적 자기 인식마저 닮아 버렸나.
이 글 제목을 ‘내가 엄마와 닮은 것’이라 쓰지 않고 ‘엄마가 내게 물려준 것’이라 지었다. 좋든 싫든 엄마는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내가 엄마를 닮았다고 쓰면 그것이 마치 내 의지였던 양 좀 억울하다. 그저 유전적 형질을 물려받고, 하나의 문화로서 엄마의 세계를 학습했을 뿐 딸들에게는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충분하다.
나 역시 그렇다. 엄마처럼 된장국을 좋아하지만, 그만큼 파스타도 좋아하게 됐다. 엄마를 닮아 앉은 자리에서 빵 서너 봉은 우습지만, 그 습관은 이제 버리련다. 엄마가 평생을 의지했던 자식을 나는 낳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생필품은 떨어지기 전에 사고, 쇼핑백도 열심히 모은다. 여름이면 엄마의 손맛을 흉내 내 요리하곤 한다. 엄마가 준 것들을 명확히 파악해 취사선택 할수록, 엄마와 딸로 묶인 팔자와 상관없이 더 자유로워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