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엄마를 마주하는 일

엄마에 관한 글쓰기 8

by 조각보자기

8월은 엄마 생일이 있어 나는 여름휴가를 해남에서 보내곤 했다. 그 해에도 그랬다. 다 같이 계곡에 갈까 아니면 해수욕장에 갈까 들뜬 마음으로 5시간을 달려 고향집에 도착했다.

엄마가 이상했다. 몇 걸음 못 떼고 주저앉았다. 허리는 눈에 띄게 굽어 있었다. 아, 엄마에게 허리디스크가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

몇 해 전, 엄마는 내게 특정 병원을 언급하며 예약을 해달라고 했다. 척추 전문 병원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다리가 저리는데, 서울 그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효과를 본 아짐들이 여럿이라며 본인도 주사를 맞겠다고 했다.

MRI를 찍은 엄마는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당장 수술 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 못 걷게 될 것이라고 겁을 줬다. 한 쪽 다리를 질질 끄는 어떤 이의 영상도 보여줬다.

엄마는 해남에서 여기까지 올라왔고, 지하철도 혼자 못 타는지라 자식에게 매번 의지해야 하는데 자식도 얼마 전 결혼해서 바쁘다며, 당장은 입원도 수술도 어려우니 일단 주사 한 대만 놓아 달라 했다. 의사는 그런 엄마에게 주사로는 안 된다며 핀잔을 줬다. 나는 불쾌해졌다. 엄마는 전보다 조금 느리게 걸을 뿐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수술만이 답인 것처럼 얘기하니 돈독이 올랐구나 싶었다. 엄마는 뜻대로 50만 원 상당의 주사를 한 대 맞고 내려갔다. 전처럼 씩씩하게 일했다. 그런 엄마가 익숙한 나는 엄마에게 다리가 좀 나은지 어떤지도 묻지 않은 채 5년이 흘러 버렸다.

급한 대로 엄마를 싣고 해남 병원에 갔다. 의사는 엄마가 허리디스크 진단을 받은 적 있다는 나의 말과 발등부터 허벅지까지 찌릿하고 저리다는 엄마의 설명만 듣고 어떤 시술을 권했다. 엄마는 결국 또 주사 한 대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5년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주사가 6만 원 정도로 훨씬 저렴했다는 것 뿐.

시골집은 좌식 생활을 했다. 오르내리는 토방도 허리와 다리에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쪼그려 앉아야 하는 화장실도 바깥에 있었다. 엄마는 통증을 참아가며 간신히 일상을 영위했고, 밤에는 잠 못 이루고 끙끙 앓았다. 그런 엄마와 2박 3일을 엉망인 기분으로 지내고 올라왔다.

“엄마 때문에 내 휴가 망쳤잖아. 그러니까 디스크도 있는 사람이 일을 쉬엄쉬엄 했어야지. 맨날 그렇게 일만 하더니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제 엄마 드러누우면 어떻게 해? 누가 엄마 똥 치우냐고! 다 엄마가 자초한 거야. 난 몰라!” 못된 내 말에도, 엄마는 오랜만에 집에 와서 병수발만 하고 갔다며 내게 미안해했다. 지긋지긋한 농사일, 영양제마냥 먹어대는 뇌선, 웬만한 아픔은 참고 사는 엄마, 나는 모든 것에 짜증이 치밀었다. 아픈 엄마에게 폭언을 퍼붓고 있는 내 자신이 제일 싫었다.

“아야, 아무래도 찬바람 날 때나 수술을 해야겄다. 밭에 것들 두고 지금 입원하믄 쓰겄냐. 다 거둬 놓고 수술을 하든 뭘 하든 할란다. 그란디 전에 갔던 그 병원으로 다시 가야쓰까?”

엄마는 꾸역꾸역 추수를 끝내고 엄마 말대로 찬바람이 부는 11월 말이 되어서야 서울에 왔다. 그 사이에 아빠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을 오가며 병간호도 해야 했다. 10분 거리의 버스 승강장에 닿기까지 몇 번이나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했을까.

아직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는 아빠와 그새 허리가 더 굽은 엄마가 버스에서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았다. 두 노인을 마주하는 내 마음에도 쿵 하고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나는 뒤돌아 도망가고 싶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야 했다. 경운기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었던 아빠가 정신을 차린 뒤 전화한 사람은 나였다. 큰 대학병원 안에서 엄마가 길을 잃지 않도록 살펴야 하는 사람도 나였다. 망연자실한 부모님 옆에는 오직 나뿐이었다. 내가 늙고 아픈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다시 MRI를 찍어보니 전보다 디스크가 더 돌출돼 신경이 눌려 있었다. 의사는 당장 수술을 하라고 했다. 심란해진 엄마가 엊그제 수술을 했다는 환자에게 수술비를 물었다. 이것저것 천만 원이 넘었다 했다. 엄마는 혀를 내둘렀다.

엄마가 수술비를 걱정할 때 나는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대학병원은 3개월 뒤에나 진료가 가능했다. 척추 전문 병원의 좋다는 후기를 마냥 믿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아는 분이 먼저 허리 수술을 받고 추천해 준 병원이 마음에 들었다. 의사는 친절했고,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병원에 소속된 간병인도 있었다. 하지만 국제병원이라 그런지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이름이었다.

혹시라도 내 결정으로 엄마가 잘못될까봐 두려워, 나는 수술일을 잡고도 그 곳에 관한 온갖 자료를 검색했다. 어떻게든 확신을 갖고 싶었다. 엄마의 수술이 온전히 내 몫이라는 게 솔직히 버거웠다. 하지만 엄마에게 들키면 안 되는 불안이었다. 나는 신경이 곤두서 엄마를 향해 괜한 호통을 쳤다. 엄마가 깜짝 놀라 내 눈치를 봤다. 어린 나의 등짝을 때리던 엄마가 어느새 이렇게 약해져버렸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엄마는 수술이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 엄마의 긴장과는 상관없이 엄마를 실은 침대가 수술실로 빨려 들어갔다. 수술실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 더디 흘렀다. 수술은 4시간 반이 지나서야 끝났다. 의사는 유리병에 담긴 디스크 수핵 조각들을 보여주며 이미 으스러진 터라 깨끗하게 제거하는데 오래 걸렸다고 했다. 아직 마취가 덜 깬 엄마의 눈빛이 공허해 꼭 우리 엄마가 아닌 것 같았다. 낯선 지역의 낯선 병원, 낯선 상황에서 우리는 함께 울었다. 우리 둘뿐이었다.

저녁이 되자 엄마는 내가 알던 엄마로 돌아왔다. 본인 때문에 휴가를 많이 써서 어떡하냐며 이제 퇴원일에나 오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입원해 있는 2주 동안 이사를 마쳤다. 모든 것이 다 잘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야, 여그 방에서 호수가 쫙 보잉께 마음이 겁나 좋다야. 간병인 아줌마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내가 복이다야. 우리 의사 선생님 참 좋아, 이상 인기가 많겄어야. 여 아짐은 나보다 두 살 더 잡솼구만 인자 퇴원한다고 아들이 왔어야.”

6인 병실에서 인싸가 되어 버린 엄마가 마침내 퇴원 후 새집으로 왔다. 허리를 쓰는 움직임은 조심스러웠지만, 다리에 전 같은 통증은 없으니 살 것 같다고 했다. 퇴원 기념 꽃을 받고 칠십 평생 처음이라며 좋아했다. 컨디션이 좋은 엄마는 TV에 나오는 피자 광고를 보고 치즈가 쭉 늘어지는 손동작을 흉내 내서 나와 신랑을 웃겼다.

엄마는 얼마 뒤에 ‘운암댁은 2020년 일을 하지 않는다’라는 각서를 쓰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해에는 정말 평년보다 일을 덜했다. 시골에는 디스크 수술 후에 괜찮다고 무리해서 일 하다가 더 안 좋아진 사례가 많았다. 엄마는 ‘내 딸이 나 살려 놨으니 내가 꼭 관리를 잘 하마’ 약속했다. 병원에서 알려 준 운동도 매일 하고, 약도 1년 동안이나 잘 챙겨 드셨다.

그리고 2021년, 그새를 못 참고 엄마는 또 일에 손을 댔다. 남의 일까지 가서 고구마순도 놓고 양파도 캤다. 또 뇌선을 털어 넣었다. 각서에 2020년 ‘부터’라고 쓰지 않은 내가 바보다.

이번 생일이 지나면 엄마는 74세가 된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내일 갑자기 아프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다. 아픈 엄마를 다시 마주하게 되면, 그땐 준비가 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엄마가 아팠던 지난 일을 회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을 곱씹을수록, 그해 겨울 내 가슴 속에 있던 돌덩이가 사랑의 이면이었음을 깨닫는다.

이전 07화엄마가 내게 물려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