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 관한 글쓰기 10(완결)
요즘엔 자주 잊어버린다. 휴대폰을 어디에 두었는지 한참을 찾는다. 뭘 하려고 마당에 나왔는데 그게 뭐였는지 몰라 다른 일로 새곤 한다. 얼마 전에는 갑자기 전화 거는 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마침 집에 내려 온 딸이 찬찬히 알려줬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귀도 점점 안 들린다. 사람들은 나보고 사납게 얘기한다고 하지만, 내 딴에는 최대한 크게 얘기하느라 그렇다. 남편이 귀 먹었다고 타박한다. 그러는 당신은 안 먹은 줄 아나. 그렇지만 아직 보청기를 하기에는 젊은 나이다. 좀 더 안 들리면, 80줄이 넘어가면 그때나 해야지. 보청기는 20만 원 정도라니 까짓거, 별 거 아니다.
어느덧 내 나이가 이렇게 됐다. 이제 나도 다 돼 버렸다. 쌀가마니도 짊어지고 나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청춘은 어디로 갔을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건강한 몸뚱이를 줘서 오늘날까지 크게 아픈데 없이 일하고 살았다. 욕심 같아서는 몇 년 더 농사일을 하고 싶지만, 자식들 눈치도 보이고 70이 넘으니 확실히 기운도 쇠하다. 가끔은 삼시세끼 밥 차리기도 귀찮다. 이날 평생 차려준 밥 먹고 방으로 쏙 들어가던 남편이 요새는 가끔 밥에 불을 킨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래도 우리 부부 모두 아직 밥맛이 좋고 잘 먹으니 다행이다. 이만큼 일했으니 여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남은 날들 이대로만 살다가 가면 좋겠다.
지난 세월 생각하니 감회가 참 새롭다. 아들 하나 있는 것 대학에 보내려고 했는데 아들은 공부에 영 흥미가 없었다. 대신 늦둥이 딸이 공부를 잘했다. 딸은 시키지 않아도 책을 봤다. 숙제 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울어대는 통에 애를 먹었다. 내가 알려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배운 것이 없었다.
내 자식들이 나처럼 부모 복 없이 살게 할 수 없어 열심히 살았다. 사람들은 나보고 돈만 벌다 죽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그렇게라도 자식에게 돈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걱정을 하며 돈을 벌지 않는 게으른 부모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덕분에 말년에 돈 한 푼 없이 자식에게 골칫거리인 부모는 되지 않아 다행이다. 자식들도 크는 동안 속 한 번 안 썩이고 잘 컸으니 내가 부모 복은 없어도 자식 복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쪼록 자식들이 우리 떠난 뒤에도 서로 데면데면하지 않고 의지하며 잘 살았으면 좋겠다.
딸은 나더러 일밖에 모른다고 원망을 쏟아낼 때도 있었다. 딸 입장에서는 그럴 만하다. 시어머니가 당신 손주들을 금이야 옥이야 예뻐해 주신 덕에 나는 더 밖으로 나가 일을 했던 면도 있다. 젖먹이 딸을 어머님과 함께 아들 자취집에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연진이는 어릴 때 나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그런 딸이 서운하기도 했다. 나이는 많지만 부모 노릇 잘 하고 싶어 열심히 일했던 건데, 딸은 엄마인 내가 자기에게 각별한 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어쩌다 느즈막히 얻은 이 딸 덕분에 언제나 행복했다.
요즘은 딸 덕에 내가 호강이다. 엊그제도 내 생일이라고 먼길을 왔다. 딸은 잔소리도 하고 성질도 내고 상처도 주지만 그래도 더 이물없다. 아빠를 탁해 무뚝뚝한 아들은 솔직히 좀 어렵다. 가장 노릇 하느라 힘들 아들에게는 아프단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늙을수록 딸에게 더 의지하게 된다.
딸은 어릴 때부터 순했다. 들에 갈 때 리어카에 딸을 싣고 새우깡 한 봉지 뜯어 뿌려주면 그것을 주워먹으며 보채지 않고 잘도 놀았다. 그러다 우리 말소리가 안 들리면 리어카 귀퉁이를 뽈깡 잡고 일어나 이리저리 살피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그러던 갓난쟁이가 벌써 서른 중반이라니, 나도 그에 맞게 늙어야 맞다.
나는 자식 덕에 이렇게 행복한데, 딸은 애를 낳지 않는다. 딸이든 아들이든 하나만이라도 낳으면 내가 올라가서 키워준다고 해도 듣는 채도 안 한다. 나는 이렇게 나이 먹고 자식이 있으니 좋다고 말하면, 딸은 자식 입장에서는 좋을 게 없다고 받아친다. 혹시 이제 내가 자식에게 짐이 되는 걸까 걱정도 된다.
뭐 딸의 인생은 본인의 선택이니 나도 그러려니 해야지, 별 수가 없다. 하긴, 요즘은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우리 때 같으면 자식을 셋, 넷 낳아서 들쳐 업고 밭을 맸을 텐데 지금은 농사만 봐도 다 기계가 하고, 농약도 헬리콥터로 치는 시대다. 젊은 농사꾼들은 땅을 일단 크게 장만하고 일꾼을 산다. 이제 우리 식은 참말 구식이 됐다. 아무쪼록 자식들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 잘 살아야 할 텐데.
그런데 가끔 딸은 그런 세상을 따라가기가 힘에 부친다며 투정을 부렸다. 아들은 스물 여섯에 들어간 회사를 쉰이 넘도록 여태 다니는데, 딸은 툭하면 회사를 그만두었다. 언젠가부터는 시골로 내려와 살겠다는 말도 자주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딸을 나무랐다. 짜잔하기 그지없는 소리다. 피디인지 뭔지 되겠다고 죽어도 서울로 간다고 하더니. 봐라, 엄마 말 안 들으니 니가 고생이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딸이 안쓰럽다. 천성이 무르니 서울살이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회사가 힘들다며 우는 딸에게, ‘어쩌겄냐, 전뎌야지’라는 말 밖에 못해줬다. 딸은 자신의 못남과 부족함을 탓했다. 마음이 아팠다. 내 눈에 딸은 언제나 똑똑했고, 우리가 모르는 것도 많이 알았다. 못난 것이 있다면 그건 부모인 나였다. 부족한 부모 만나서, 내가 해 준 것이 없어서 딸이 힘든 건 아닐까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사랑하는 내 딸, 반듯하고 착하게 커줘서 고맙다. 살다 보면 힘든 일, 슬픈 일, 기쁜 일 다 겪는 게 인생이란다. 늘 너에게 참고 견디고 인내심을 가지라고 했는데, 이제는 삶을 가볍게 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까짓 거 못할 것 없다, 자신감을 가지렴. 어짜든지 마음을 편하게 먹고 살아라.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이 최고니까 항상 끼니 잘 챙겨 먹고. 엄마는 네가 있어 참 좋다. 우리 딸도 그곳에서 언제나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