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없는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엄마에 관한 글쓰기 9

by 조각보자기

그즈음 나는 부모님의 부고 문자 보내는 법을 궁금해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내는 거지? 어떤 관계까지 알려야 할까? 정신이 없을 텐데, 상조회사에서 해 주나? 분명 중요한 일인데 배운 적이 없다. 인터넷을 찾아 봐도 부고 문자 양식 외에는 마땅한 내용이 없었다. 하긴, 슬픈 일을 겪은 사람들이 그런 후기를 남길 여유는 없겠지.

부모님 중 누구라도 돌아가시는 생각을 하면 당연히 슬프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언젠가는 겪을 일이니 준비해야지, 이런 생각을 그날은 이성적으로 하고 있었다. 마치 다가올 업무를 미리 숙지하는 것처럼.


오랜만에 들어간 이웃 블로그의 새 글은 ‘엄마’라는 단 두 글자였다. 엄마라는 제목의 글이 세 개나 있었다. 가슴이 쿵하고 떨어졌다. 게시일을 보니 한참 지난 가을의 일이었다. 짧은 글 안에는 꾹꾹 눌러 쓴 듯한 슬픔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지금은 좀 괜찮을까. 블로그를 통해 안부를 묻던 얼굴 모를 이지만, 가까이에 있다면 안아주고 싶었다.

엄마의 죽음은 목구멍이 메는 슬픔이다. 아무리 평소에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타인의 소식만으로도 감정이 이입돼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결국 나는 설거지를 하다가 무너졌다. 마치 그 순간에는 당장 엄마가 떠난 듯 현실 감각을 잃고 한참을 울다가 정신 차렸다.


엄마가 아팠을 때, 나는 엄마가 가여웠다.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어 엄마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픈 엄마를 외면하고 싶었다. 가슴 속 돌덩이를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었다. 버거운 관계로부터 달아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결국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었다고 안도하자 깊은 우울이 찾아왔다. 엄마는 왜 나를 낳았을까, 오래 묵은 질문이 터져 나왔고 그것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 됐다가 연민이 됐다가 하며 나를 괴롭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을 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에 부쳤다. 전문가는 말했다. 내가 엄마가 돼 줘야 할 대상은 엄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고. 내 안에는 오래 전 엄마가 했던 말에 종속돼 여전히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감정을 너그럽게 헤아려주는 법부터 배웠다. 엄마가 해 주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해야 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이런 글을 쓰며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주로 엄마 인생과 내 인생이 별개라는 식의 글맺음을 한다. 엄마와 며칠을 함께 있어도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 나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엄마를 위한다. 엄마를 돌보느라 내가 다시 아플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을 생각하는 일에는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 죽는다는 건 이 세상에 없다는 것. 어디를 가도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가 없다.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지금은 너무 당연한 것들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그것이 정말 슬프다.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억장이 무너진다. 늙은 채여도 괜찮으니 엄마가 이 세상에 있기만 하면 좋겠다.


누군가의 죽음은 수 년 간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지금은 할머니가 없는 세상을 당연한 듯 살고 있지만, 나는 할머니를 보내기 전에도 오래 울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자각했다. 수업 중에 문득 할머니가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90세가 넘자 급격히 쇠약해졌다. 나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자주 울었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나를 챙겨주고 예뻐해 준 할머니가 떠난다는 것이 슬퍼 울었다. 가만히 누워 있어야만 하는 인간의 말년이 서글퍼 울었다. 3년을 울고 나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죽음은 중학교 때부터 생각한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는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데 꼭 거짓말 같았다. 수도 없이 상상한 일이라 해도 갑작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후회와 그리움에 몇 년을 더 울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은 할머니의 부재가 익숙해졌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엄마도 그럴 수 있을까? 부모님의 부고 문자에 대해 탐구하던 날처럼, 누구나 죽는다는 자연의 이치를 아는 이성으로, 나라는 작은 자아에서 벗어나 우주적 관점으로 엄마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느 날부터 엄마와 나는 대화에서 ‘나 죽으면’, ‘엄마 없으면’이라고 심심치 않게 얘기한다. 십 년 전 즈음, 그런 말을 입에 처음 올릴 때만 해도 나는 목이 메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엄마의 죽음을 언급한다. 엄마는 부모가 늙어서 한없이 살아 봤자 좋은 소리 안 나온다며, '오메, 우리 엄마 보고잡다' 생각나게 적당한 때에 가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 이별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주 내뱉어서 익숙해지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날이 정말 오면, 그때는 함께 이야기할 엄마가 없다. 생각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천지차이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엄마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전화할 수 있었는데 전화하지 않았다. 엄마가 아직 있고, 사랑할 시간이 있었는데 게을러서 이 시간을 그냥 흘려버렸다. 나중에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오늘을 후회할 것이다. 엄마 없는 세상을 준비하는 일은 어느 단계쯤 와 있는 걸까. 나는 지금부터 계속 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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