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독에 시달린 궁상이

설화 '궁상이와 명월각시'

by 장아연
궁상이: 죄를 저질러 인간세상에 떨어진 신선


궁상이는 원래 선계의 신선이었으나, 죄를 지어 인간세상에 떨어졌다. 그는 절세미인의 명월각시를 부인으로 삼았다. 궁상이에겐 배선이란 절친한 친우가 있었다. 어느 날, 궁상이는 전재산을 걸고 배선이와 바둑을 두다가 지고 말았다. 배선이는 간악하여 궁상이에게 명월각시를 걸고 한 판만 더 하자고 하였다. 배선이의 꾀에 속아 넘은 궁상이는 명월각시를 걸고 바둑을 한판 더 두지만, 끝내 지고 말았다. 명월각시를 배선이에게 보내야 할 처지에 놓인 궁상이는 엉엉 울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석 달 열흘이면 됩니다."


다행히 명월각시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명월각시는 배선이에게 석 달 열흘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석 달 열흘 동안 명월각시는 소고기를 넣은 궁상이 옷을 만들었다. 함에 궁상이의 구슬 옷을 넣었다. 석 달 열흘이 흐른 뒤, 배선이 다시 찾아왔다. 궁상이를 데려갈 것을 간곡히 청하였지만 배선은 코웃음 치며 궁상이를 바다에 빠뜨렸다.


바다에 빠진 궁상이는 어떤 거북이의 도움으로 갈대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학을 만났는데 궁상이는 옷 안에 있는 소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먹이를 얻어먹은 학은 궁상이가 갈대밭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갈 곳 없는 궁상이는 거지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명월각시는 계속 배선이와의 혼인을 미루었다. 혼인을 올리기 바로 직전, 명월각시는 거지들을 위해 잔치를 열자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궁상이는 밥을 먹으러 가지만, 시비들은 궁상이에게만 음식을 주지 않았다. 분노한 궁상이가 화를 냈다. 명월각시는 궁상이를 따로 불러 진수성찬을 내어주었고, 그걸 본 다른 거지가 항의했다. 명월각시가 말했다.


"사실 이 잔치를 연 건 내 남편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이 구슬 옷을 입는 사람이 나의 남편이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거지들과 배선이는 구슬 옷을 입으려 안간힘을 썼다. 원래 구슬 옷은 궁상이의 것이니 당연히 그 외의 사람들은 입을 수 없었다. 끝내 궁상이가 구슬 옷을 입자, 명월각시는 이 자가 나의 남편이라고 선언했다. 궁상이를 되찾은 명월각시는 열심히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고, 궁상이는 명월각시의 도움으로 죄를 씻고 다시 선계에 올라 신선이 되었다.




설화 속 주인공들이 아무리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이 설화의 궁상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동적인 인물이었다. 명월각시가 없었더라면 궁상이는 갈대밭에서 아사할 게 뻔했다. 말도 안 되는 배선이와의 내기를 통해 자기가 가진 복 명월각시마저 잃을 뻔한 궁상이는 설화가 끝날 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에 의존했다. 오히려 이 설화의 주인공은 명월각시이다.


나는 19살에 이 설화를 접했다. 한창 입시 실기를 준비하던 참이었고 특이한 소재를 찾아 헤맸다. 우연처럼 발견한 이 설화에서 내가 읽은 건 '변화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바로 궁상이었다. 홀린 듯이 콩트를 쓰기 시작했다. 약 2천 자 내외로 완성이 된 콩트는 이런 내용이었다.


21세기 야근을 일삼는 궁상이는 텅 빈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한다. 친구 배선은 돈을 빌리곤 잠적했고, 빚을 갚기 위해서 궁상이는 무리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갑자기 등장한 명월각시는 궁상이가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에 궁상이는 자신이 원래 선계의 신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름을 타고 나타난 명월각시가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지만, 궁상이는 창문을 닫은 후 다시 일하기 시작한다.


결과가 어땠느냐고? 처참하게 망했다. 19살이 쓰는 직장 서술은 형편없었고 대학이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어쩌다 보니 짧은 직장 경력이 있는 파트 타이머가 되었다.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면서 주 6일 출근했던 시절이 있었다.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9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년 동안 반복했다.


"어떻게 온종일 글만 쓰면서 살 수 있겠어? 그거 돈 안 되잖아."


어째서 예술가들은 굶어 죽기 딱 좋은 환경에 처한 걸까. 기약 없는 프리랜서 생활은 생명 연장에 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나는 우연한 계기로 강사가 되었고 자격증까지 땄다. 2년쯤 지났을까, 정규직 제안을 받았다. 회사 생활하면서 글 쓰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막상 회사 일이 바빠지니 내가 가장 먼저 버린 건 글이었다.


주 6일 동안 12시간씩 일하려니 기운이 없었다. 인력이 모자란 탓에 내가 잡일을 도맡았다. 체감상 3인분의 업무였다. 12시간 동안 쉬는 시간 한번 없이 계속 일했다. 열이 38도까지 올라도 나는 출근했고 거기에 상사의 개인 업무까지 추가되었다. 주변에선 그만두라고 닦달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돈을 벌지 못하면 나는 또 굶주림에 시달릴 것이며 영영 글을 쓰지 못하리란 막연한 공포가 일었다.


간접흡연, 쌍욕, 과다 업무, 온갖 스트레스를 다 얻고 난 후 과로사 하기 직전쯤 나는 퇴사했다. 온몸은 만신창이였고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막상 퇴사하니 후련함보다 불안이 덮쳤다. 그렇다. 나는 지독한 일중독이었다. 10대 시절부터 마감에 허덕이던 나는 매일 일했고 그것에 뿌듯함을 일했다. 일하지 않은 나는 형편없이 느껴졌다.


"좀 쉬어라."


주위 사람들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나는 나를 극한까지 몰아넣는 걸 참 좋아했다. 번아웃이 올 때까지 글을 쓰고 막상 번아웃으로 아무것도 쓸 수 없으면 자책했다. 번아웃을 기세로 이겨내기 위해서 토할 때까지 글을 쓰기를 반복했다. 효과는 꽤 좋았고 이게 자기 학대라는 걸 깨닫는 과정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퇴사를 하고 사흘 뒤, 나는 한 학원으로부터 연락받았다. 그곳이 내가 지금까지 파트 타이머로 일하는 곳이었다. 오래간만에 마주한 설화 '궁상이와 명월각시'는 여전했다. 명월각시는 현명하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궁상이는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여러 일을 겪으며 내가 느낀 건 하나였다.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대체 왜?


미지의 세계로 걸어가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웠다. 오죽하면 모험을 위해선 자기 세계를 깨야한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도전하길 주저앉지 않지만, 가끔 일이 없는 날엔 급격히 방황했다. 운동하거나,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나 자신을 돌보는 건 아직도 어색했다. 파트 타이머로 일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에도 나는 여전히 일중독이었다.


다른 사람은 휴식을 어떻게 보내는 걸까?


내게 휴식이란, 침대에 누워서 릴스나 쇼츠를 보는 게 전부였다. 어쩌면 궁상이도 다르게 사는 법을 몰라서 여러 불행을 겪었을지도 몰랐다. 요즘 나는 루틴에 관심을 기울였다. 글쓰기나 강의하는 법 말고 관리법을 찾아봤다. 수분 팩은 뭐가 좋은지, 이 계절엔 어떤 네일아트가 유행인지. 어째 알아갈수록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1시간 내외로 끝날 사소한 일을 계획표에 적어두었다. 하나를 마치면 파란 볼펜으로 v표시를 해두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내 앞으로 남은 마감을 떠올렸다. 아직 진전이 되지 않은 사건이나 플롯 따위를 머릿속에 재생했다. 숨 가쁘게 보내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20대 초반, 오늘만큼은 쉼표를 찍기로 했다. 앞으로 일할 날은 80년이나 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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