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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의 연극 무대, 그 기적같은 시간

by 봄마을

어제 저녁, 그동안 고생하며 준비한 첫째의 연극 무대가 있었다.


무대 의상 준비팀이었던 아이는 그동안 매일 밤 늦게까지 학교에서 아이들과 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공연 전날 마지막 dressed 리허설을 마친 뒤 디렉터가 의상을 수정하라는 폭탄을 던져서 공연 당일 무대에 배우들이 서기 직전까지 제대로 밥도 못먹고 의상팀 아이들과 함께 의상 수정을 해야 했다.


공연 당일.

첫째는 일찌감치 학교로 다시 갔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공연 시간에 맞춰서 다 함께 이동했다. 꾸준히 연극/뮤지컬 팀에서 활동해온 둘째 덕분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의 공연은 여러차례 관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고등학생들의 연극은 중학교까지와는 달랐다. 공연 수준도 무척 높았지만 중학교까진 선생님들이 주도가 되어 진행된다면 고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모든걸 책임지고 진행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안전관리 정도.


연출과 연기 지도는 물론이고 포스터 제작을 포함한 각종 홍보, 무대 장치 제작, 의상, 음악, 음향효과 및 조절, 무대 배경으로 쓰이는 영상 제작(무대와 연계시켜 자연스럽게 만들었는데, 마녀가 연기와 함께 새로 변신해서 날아가는 장면-실제로는 연기에 배우가 몸을 숨기고 연기에 가려진 스크린 부분에서 새가 나와 화면 너머로 사라지는 연출-은 정말 감탄을 했다)을 비롯 티켓 판매부터 공연 운영까지 모든걸 아이들이 진행했다. 심지어 브레이크 시간에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는 팀도 따로 있었다.


티켓은 현장 구매도 가능 했지만 사전에 온라인으로 예매를 하지 않으면 좌석을 미리 지정할수 없기 때문에 미리 티케팅을 했다. 공연은 총 네 번, 목/금요일은 한번씩, 토요일은 두 번 하는데 공연마다 좌석이 거의 다 찰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지역 소식지에 광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첫째가 다니는 고등학교에는 몇 개인지 다 알기 어려울 정도로 클럽이 많은데 각 클럽들의 활동 수준이 높다. 영상 제작을 하는 클럽도 있고 방송 촬영을 하는 클럽, 비즈니스 경영/마케팅 클럽, 음악 등등 정말 수없이 많다. 그리고 이런 클럽들의 역량이 이 한번의 공연에 결집된 것 아닌가 싶었다.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멕베스였는데 이 역시 아이들이 각색을 했다. 원작의 중세 배경이 아니라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가 배경이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문명이 퇴보한 결과 다시 중세 시대의 왕과 같은 개념의 지배자가 등장했다는 설정이었다. 이런 배경 설정 자체도 흥미로왔고 각색도 잘 했다.

공연 도중에는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이 금지여서 커튼콜만 찍었다. 가장 앞에 있는 아이들은 커튼콜을 위해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고 나온 준비팀이다.




마지막 커튼 콜을 할 때 배우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무대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했던 아이들까지 모두 나와서 인사를 했는데 이들이 주연 배우들보다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일부러 그런건지 어떤 의미를 담고자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무대 뒤에서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가장 화려한 순간에 제일 앞으로 나와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는 사실이 뭉클했다. 첫째도 이렇게 나와 인사하는 무리에 섞여 있었다.




총 사흘간 진행된 공연에서 파티(한국식으로는 뒷풀이)가 두 번 있었다. 한번은 금요일 저녁에 있었던 학교 공식 파티. 저녁을 먹을 시간도 없이 공연을 한 모든 아이들을 공연을 마친 뒤 인근 식당으로 데려가서 늦은 저녁을 먹이며 웃고 떠드는 자리였다. 밤 11시쯤 파티(..라기 보단 늦은 저녁)가 끝난 뒤 식당으로 데려가서 아이를 데려왔다. 두번째 파티는 비공식적인 파티였는데 토요일 마지막 공연까지 다 끝난 뒤 연극에 참여한 한 아이의 가정에서 집을 파티 장소로 제공해서 원하는 아이들이 그 집에 모여서 파티를 즐겼다. 첫째에게 물어보니 가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밤 12시가 다가오자 아이에게 데리러 와 달라는 연락이 와서 아내와 함께 가서 데리고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의 흥분된 목소리로 얼마나 이번 공연 준비가 힘들었는지.. 하지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떠들었는데 듣는 내내 아내와 내 마음도 함께 들떴다. 힘든 일을 해내고, 정장을 입고 앞에 나서서 그 결과를 축하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인사를 하는 아이를 보니 이제 정말 아이가 집을 떠날 시간을 준비할때가 됐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2년 남았나.


집에 돌아와 아이가 잘 준비를 하는 사이 아내와 마주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첫마디는 이거였다. 지난 2년, 어쩌면 그보다 더긴 시간 첫째가 극복해낸 일들을 생각하면 오늘은 기적과 같은 하루라고. 정말 기적과 같은 하루였다. 이런 하루를 얼마나 기도하고 바랬는지. 하지만 아이에게는 구구절절 이야기 하지 않았다. 단지 자러 들어가며 인사하는 아이를 힘주어 안아주고 말했다. 이런 큰 일을 해낸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아이도 구구절절 길게 답하지 않았다. 그냥 힘을 주어 나를 함께 꽉 안으며 말했다. "네." 라고. 아이의 그 짧은 단어에 담긴 의미를 느끼기에 아이의 힘찬 포옹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지난 사흘간의 연극 무대는 아이가 자신이 이룬걸 남들에게 보여주는 자리를 넘어 스스로를 증명하는, 스스로에게 나는 이제 준비됐다고 이해시키는 시간들이었다.


2025년, 이 기적같은 연말을 보낼수 있게 우리 가족을 지지하고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 인사와 기도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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