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복되는 감정과 행동을 인식하자.
매일 반복되는 감정이 원망, 불만, 분노, 짜증, 후회라면 인생이 고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감정들은 사람들과의 갈등, 과도한 쇼핑, 자극적인 음식, 쾌락 추구 같은 건강하지 못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건, 이 감정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감정 속에 머무는 시간이 몇 년씩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내 분노가 타당하더라도, 그 감정에 갇혀 살아간다면 결국 가장 큰 손해는 내가 보게 된다.
‘내가 매일 반복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 매일 써보자.
가까운 가족에게 짜증을 냈다면, 그 짜증은 내게 만든 그 사람의 잘못일까?
많은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짜증은 내 문제다. 원망도 내 문제다.
그래서 나는 매일 "짜증내지 말자"고 썼다.
100일 넘게 그렇게 쓰자 효과가 나타났고, 1년을 넘기자 그 문제는 거의 사라졌다.
- 나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이웃과는 거리두기를 해보자.
나를 향해 비난과 지적을 일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최소 몇 년만이라도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해보자. 물리적인 거리든, 감정적인 거리든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먼저다.
-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가까이하자.
주변을 둘러보며 그런 사람을 찾아보자.
기회가 된다면 다가가 친구가 되어보자.
그들과 함께하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없다면, 격려와 응원의 글을 찾아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다음 자존감 훈련은 ‘아픔 드러내기’다.
숨기고 싶은 나, 부끄러운 나를 세상에 내보이는 것.
그것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흔히 ‘완벽한 모습’을 갖춘 후에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때는 오지 않는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결국 자신으로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려면, 먼저 내가 나를 좋아해야 한다.
내가 나를 좋아하려면, 적어도 나 자신에게 좋아할 만한 이유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나는 그 이유를 ‘솔직함’에서 찾았다.
최근 아내가 수영을 시작하면서, 함께 수영하는 분들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사는 동네, 출신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고한다.
아내는 어디서든 출신 학교를 밝히지 않는 편이었다. 그 이유는
1등이 아니면 대우받지 못하는 학창시절 동네(강남8학군)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뭐 어때? 그 출신 학교도 너의 일부인데.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되는 분위기라면, 한번 말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물론 실행 여부는 아내의 몫이다.
누군가는 가난을 숨기고 싶고, 또 누군가는 학벌이나 가족사를 숨기고 싶을 수도 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때로는 그런 것들을 밝히는 것이 관계를 더 가깝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내 부끄러운 경험들도 글로 모두 적었다.
아이들에게 소리 지른 일, 고등학교 시절 뒤에서 2등한 일, 아내와 오래 싸운 끝에 아들이 ADHD 상담을 받았던 일까지 썼다.
그런 이야기들이 독자님들과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래, 나 공부 못했었다." "그래, 우리 부모님 사이 안 좋았다."
김창옥 강사님이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셨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강단'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열등감에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오히려 상처가 공감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 내 글은 다소 ‘과하게 솔직한 글’이 되었다.
우리는 상처를 통해 연결된다.
약간의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때로는 약점을 드러내보는 용기를 내보면 어떨까?
몇 년 전, 친구에게 “편입으로 서울에 왔다”고 굳이 묻지 않는 사실을 말한 적이 있다. 서울에서 만났기에 내가 그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몰랐다. 이 친구는 내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했기에, 실망시킬까봐 밝히기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 뭔가 숨기고 떳떳하지 못한것도 싫었다.
좋은 학교에서 전공을 바꾸려고 편입한 경우라면 이런 자격지심이 없겠지만, 나에게는 민감한 주제였다.
"나,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 정말 못했어.
시골대학 갔다가 편입해서 서울로 온 거야."
"그랬구나. 근데 그게 뭐? 편입 시험 어려운 거 아냐??"
그게 다였다. 전혀 놀라지 않았다. 별 감흥이 없었다.
나에게는 큰일이었지만, 친구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마치 '큰 수치'를 털어놓는 양 힘겹게 말했지만, 전혀 타격감이 없었다.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도 하기 전에 혼자서 상상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소년마냥, 나는 내 감정과 지식에 갇혀 철창 밖을 보지 못했다.
성경, 전도서에 이런 말이 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가난, 낮은 성적, 따돌림, 부모와의 갈등.
이런 것들은 당사자에게는 큰 고통이었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겪은 일이다.
그래서 생각하기에 따라 그리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너무 특별하게 여겨, 그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이제 이렇게 말하고, 써보면 좋겠다.
"지금의 나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 아빠는 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