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독립 선언
싸우지 않기 위한 첫 번째 조치는 육아휴직이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3~4년 전부터 부부는 맞벌이를 했다. 우리 부부는 부모님께 의지하는 습관부터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아에 부모님의 관여도가 클수록 우리 부부의 싸움횟수는 비례하여 증가했기 때문이다.
아파트 청약 당첨으로 빚이 많은 상황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아내와 나 둘 중 하나는 전업주부를 해야 한다. 아내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진작에 가용한 모든 휴직을 다 써버린 상태다. 그렇다면 아내가 퇴사하던지, 내가 육아휴직을 해야 했다. 아내와 나의 연봉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결정을 앞에 두고 망설일 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연말 회사 승진 심사에서 미끌어졌다. 내가 될 거라 생각했던 자리는 새로 온 경력직 후배가 차지했다. 박힌 돌을 굴러들어 온 돌이 걷어 차낸 것이다.
석연찮은 인사였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참에 잘 됐다 싶었다. 승진을 하면 늘어난 책임으로 인해 휴직은 어려워 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아휴직을 던지고 하루에 두 번씩 밥을 차리고 치웠다. 매일 아이들 준비물을 챙기고, 둘째 딸의 머리를 묶어 줬다. 학원을 알아보고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주방 일도, 아이들 매니저 일도 다 어려웠다. 회사업무에 '정'과 '부'가 있는 것처럼 주부도 '정'의 자리는 무겁고, 보상은 없는 힘든 자리였다.
특히나 힘든 건 감정 노동이었다. 둘 중 한명이 울거나 화를 심하게 내거나 할 때는 진정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문제는 둘 다 같이 터질 때였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이 났다. 인내의 한계에 부딪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조그마한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할 수 없어서 힘들었다.
힘에 겨워 패잔병 같은 표정으로 식세기에 그릇을 넣고 있을 때 아내가 퇴근을 한다. 아내는 내 표정만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공감을 해줬다.
"오늘 힘들었지?"
아내는 내가 왜 힘든지를 이미 4년 간의 육아휴직으로알고 있던 터라, 즉각적인 공감을 해줄 수 있었다. 역지사지가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주로 갑의 위치에서 일을 했었다. 지시하고 의사결정을 해주는 역할이 많아서 감정노동이 별로 없었다. 아니, 상대방에게 감정노동을 하게 하는 쪽이었던 것 같다. 은행원이던 아내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감정노동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휴직을 하고 전업으로 아이들을 돌볼 때 함부로 말했던 날들이 너무 미안했다.
"주부가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다. 내가 옆에서 도와준다고 집안일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다. 못되게 굴어서
정말 미안해"
진심 어린 눈물의 사과가 단전에서 나왔다.
늦게라도 아내의 수고를 알아주자 아내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싸우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미안해 하는 것,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것이 싸우지 않는 방법이었다.
둘 다 재산을 불리겠다고 일을 계속하고도 싸우지 않게 되었을까?
내가 만약 주부를 하지 않았다면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나의 대답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다."이다.
적어도 나는 경험하지 않을 것을 아는 척 말할 자격이 없음을 확인했다. 주부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아는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임의로 판단한다. 그래봤자 수십 년 살고 배운 경험일 뿐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인생이 되어 보지 않고는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다.
나는 직접경험하지 않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 만용과 교만이 아내를 힘들게 했음을 인정했다. 이 인정이 아내의 오랜 억울함을 조금은 풀어주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관계 회복의 문은 그렇게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