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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by 코르테오 Mar 15. 2025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는 날이 많았다. 철없이 굴다가 혼이 났었고, 이기적으로 구는 내게 정직하게 살라며 꾸중하셨다.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때도 있었지만 억울한 날도 많았다. 하지만 논쟁하고 싶지 않아서 ‘알았다’, ‘아빠 말이 다 맞다’라며 싸움을 피해 왔다. 괜히 건드려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은 태국으로 누나와 아버지 셋이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당시에 비행기 표값과 여행 체류비를 내가 대부분 감당하고 있었는데 쓸 여행 자금이 이틀 만에 바닥이 났었다. 다행히 월급이 여행 기간에 들어올 예정이었지만 바로 들어오지 못할까 봐 내심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누나는 그런 걱정하지 말고 여행이나 즐기라 했지만, 나는 본심을 말했었다. 아버지는 안색이 변하시더니 집으로 가겠다며 귀국 비행기표를 끊으라고 막무가내였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현지인들 보는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가지 말라고 빌었다. 아버지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여행을 계속 같이하셨다. 이날의 계기로 더욱 아버지와 논쟁하고 싶은 생각은 접었다. 아버지 말이 다 맞았고, 고집으로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경기도 광주 퇴촌으로 아버지 따라 이사를 하게 되었다. 높게 보던 아버지는 어느새 나와 동등하거나 낮은 존재가 되셨다.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상을 가지신 분이 아니셨다. 내 기준에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이 싫었다. 점점 집안에 내야 할 고지서들도 내가 직접 내는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독립을 하고 싶었지만 여유 자금이 마땅치 않아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복종하며 살았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런 관계에 싫증과 불만이 쌓여갔다.


 아버지께 점점 사춘기 소년처럼 대들기 시작했다. 30살이 넘은 남자가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떨어지려 노력했다. 아버지의 조언에는 반박했고, 가족 모임에는 불참 의사를 밝히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설득과 회유를 하셨지만, 점점 그도 싸우기 싫어 그만두셨다. 부자 관계는 그렇게 점점 가족에서 개인으로 분리되고 있었다.


 설을 맞아 친가 식구들이 우리 집으로 모였다. 설을 가지 지내기 싫었지만, 겉으로 예의를 갖추며 새해 예배와 아침 식사를 했다. 같이 모여 있는 상황이 싫었던 나는 양해를 구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저 빨리 그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컸었다. 밖에서 돌아오니 아버지는 내게 불만 있냐고 화를 내셨다. 나는 퉁명스럽게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친가 모임에 참여를 하지 않겠다고 미리 말했으나 우리 집으로 강행한 아버지가 먼저 약속을 깨신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용서를 받아야 하는 나였다. 하지만 내 본심도 얘기하기 싫었고, 그와 싸우기도 싫어서 일을 덮어뒀다.


 이틀 후, 책방 사장님께서 세배는 드렸냐고 하니 순간 볼이 빨개졌다. 늘 하던 새해 인사를 내 욕심으로 안 한 사실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버지와 이미 신경질을 벌인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 싫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오히려 나를 꾸짖으셨다.


 “OO 씨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마음은 있어도 아버지 집에 살면 그의 규칙에는 따라야 해요.”


 말씀을 들으니 내가 얼마나 애같이 행동했는지 창피해졌다. 그래서 빠르게 마음을 잡고 아버지와 저녁을 먹으며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세배를 받는 것에 아버지는 처음에는 반대하셨지만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세배를 받으셨다. 식사를 다 하고 거실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 보고 세배드렸다. 덕담을 주시며 하루가 잘 마무리가 되었다. 이렇게 쉬운 용서인데 진지하게 마주 보고 싶지 않은 내가 한심스러웠다. 서로 싸우기 싫어 반목했지만, 세배를 통해 우리는 다시 마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아들 된 내가 먼저 움직여한다는 걸 이제는 깨닫는다. 용서를 먼저 하는 게 패자가 아닌 반성하는 자로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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