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9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삶과 죽음은 너무나 흔한 단어들이지만, 흔한 만큼 그에 대한 자각이나 성찰도 무뎌지기 일쑤다. 오늘 나는 엄마와 함께 생과 사, 그 경계에서 어디로 한 발을 뻗어나갈지 알 수 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여기는 호스피스 병동. 병원 진료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완화의료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호스피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죽기 전에 가는 곳'이다. 웰다잉, 존엄한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 같은 철학적인 수식어를 아무리 갖다 붙여도 우리는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호스피스는 더 이상의 적극적 치료가 무의미한 말기암 환자들이 가는 곳, 다시 말해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기 어렵다. 폐암을 앓던 엄마가 전이 없이, 힘든 항암을 견뎌낼 체력이 되었다면 우리 가족도 호스피스를 고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20년 1월 폐 선암 4기 진단.
직업적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비흡연 노인 여성이 폐암에 걸리는 것은 정말로 운이 없는 케이스다. 그러나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을 따질만한 여유가 없다. 3주 간격의 오랜 항암, 2년 여의 투병 끝에 찾아온 다발성 뇌전이. 특별히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고 지내던 어느 날 엄마는 갑자기 주저앉고 누워만 있는 처지가 되었다.
몸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연명하는 것은 엄마가 원하는 게 아닐 거라는 가족들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호스피스 완화의료로 여생을 편안하게 모시자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물론 우리의 생각은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하지 않은 엄마의 뜻과 다를 수도 있다. 정신이 더 명료한 상태에서 연명 치료에 대한 생각을 여쭈었다면 좋았겠지만, 죽음이 가까워진 노령의 암환자, 더구나 그것이 내 부모라면 어떻게 죽고 싶냐는 질문은 차마 할 수가 없다. 그러니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당신의 의사와 반한다 한들, 더 이상의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노모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식들의 합의뿐이다. 실제로 병원 입원 절차에서도 본인의 서명이 힘든 상태의 환자라는 전제 하에, 우리 4남매 중 두 사람의 진술서가 들어간 간단한 서류로 사전 연명의료 거부에 대한 법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암투병 자체도 큰 고통이지만, 코로나 시대에 병마와 싸우는 것은 곱절로 힘들다. 아무리 깨워도 눈을 뜨지 않는 엄마를 병원에 모시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병원 규모가 클수록 코로나 검사가 더 까다로워지니 중증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은 오래 앓아온 병보다 코로나가 더 원망스러울 때가 많다. 호스피스는 가장 취약한 상태의 환자를 돌보는 곳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119 구급차를 불러 입원이 예약된 병원 응급실에 왔다. 입원을 위해서는 환자와 보호자의 PCR 검사가 필수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비싼 돈을 내가며 검사까지 해야 한다. 입원을 하려면 두 가지 검사를 해야 한단다.
신속항원검사와 PCR 검사. 30여 분만에 나오는 신속항원검사에서 음성이 나오면 PCR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의무적으로 1인실에서 1박을 해야 한다. 큰 병원에서의 PCR은 5시간 정도면 결과가 나오지만, 병원은 엄밀하게 말해 의료행위를 통해 영리를 추구하는 사업체이므로 하루에 20만 원이나 하는 1인실 사용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일 아침에 다인실로 옮길 예정이라 짐도 풀지 않았는데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다.
동시간대에 검사한 사람 중에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왔단다. 이럴 경우 해당 시간대에 채취한 시액을 전면 재검사해야 하니 다인실 이동을 보류하라고 한다. 집에서 간이 검사를 하고 왔는데도 밤 11시에 이런 통보를 받으니 괜히 불안하다. 아무런 증상도 없고 괜찮지만, 혹시라도 무증상 양상 반응이 나오면 입원을 거부당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칫하다간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집에서 큰일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걱정이 꼬리를 물고 더 커지기 전에 얼른 생각을 끊는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1인실에 하루 더 머무른다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건만, 두려움을 마주하면 모든 일이 부정적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괜찮겠지? 괜찮아야지! 괜찮을까? 괜찮아야 해!'
그저 기다리는 일 외에는 되풀이되는 의구심을 잠재울 방법이 없다.
3교대로 이루어지는 전문 간병인이 있는 병원은 확실히 초짜 보호자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전문가 2명이 환자 몸을 이리저리 돌려 눕히는 것을 보니 집에서의 케어가 얼마나 어설펐는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돌려 눕힐 때마다 찡그리던 엄마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간병인들의 케어도 그 세심함은 제각각이다. 말 한마디, 손길 하나의 부드러움을 모두에게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이것은 간호사들도 마찬가지. 내가 모든 걸 할 수 없어 남의 도움을 받을 때에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입원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호스피스에 입원하기까지의 투병과정에 대해 간호사 면담을 하는 것 외에 여기만의 특별한 절차가 하나 더 있다. 병원 사회복지사와의 면담이다. 질병을 중심에 놓고 질문과 대답이 오가던 간호사 면담과는 결이 다르다. 엄마가 살아온 과정과 성격, 가족 관계, 평소 어떤 걸 좋아하고 힘들어했는지를 물었다. 가끔 병원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며 채무관계나 유산 문제 같은 의외의 질문도 있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이해하려는 질문들이다.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질문에 답을 하면서 그것이 진짜 엄마의 삶이었는지 토막토막 들어온 엄마의 삶을 내가 각색한 것인지 혼란스럽다. 죽음을 눈앞에 둔 엄마의 인생이 몇 개의 질문으로 이렇게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는 것 역시 나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질문들을 곱씹어 보니 엄마의 삶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엄마가 담담히 이야기하던 힘들었던 젊은 날들을 그저 과거 회상이라고만 여겼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같이 여행은 다녔지만, 엄마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우울한지 작정하고 들어준 적이 없었던 거다. 타인에게 들려주는 엄마의 삶이 갑자기 낯설고 안타까워 사회복지사 앞에서 나는 기어이 엉엉 울고 말았다.
병동에서의 하루는 길다.
호스피스는 죽기 전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 편안하게 생을 정리할 수 있는 곳이라는 허울 좋은 설명은, 죽음을 느껴보지 못한 자들이 내뱉는 허세가 아닐까.
의식이 있든 없든 이곳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수시로 엄습하는 곳이다. 잠든 엄마의 찡그린 표정에서, 갑자기 내쉬는 큰 숨소리에서, 자다 깬 텅 빈 눈동자에서, 그리고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두려움. 최대 60일까지만 머물 수 있다는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 끝을 예측하지 못한다.
엄마가 눈을 뜬 잠깐 사이, 가족들에게 영상 전화를 걸어주면서도 울컥 목이 잠긴다. 먹지도 못하는데 찌꺼기가 생기고 냄새가 나는 입안을 닦아주면서 입술을 앙다문 고집스러운 아이 같은 엄마 모습에 피식 헛웃음이 나기도 하는, 여기는 호스피스 병동.
눈물과 웃음, 엄마와 딸, 환자와 보호자, 전문가와 비전문가, 그 모든 경계가 생과 사의 경계 앞에서 부질없어지는 곳에서의 하루가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