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화려한 웹스윙 장면,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함께 모여 싸우는 장면으로도 볼거리는 충분하지만, 내 마음속엔 아이언맨이 스파이더맨을 훈육하는 장면이 이상하리라만큼 기억 깊숙이 남아있다.
아이언맨은 큰 실수를 저지른 스파이더맨을 혼내다 혼자 고갤 저으며 말한다.
우리 아버지처럼 말하고 있네
신혼집에서 같이 살게 된 나의 여동생.
동생은 명색이 성악을 전공하길 희망하는 대한민국 고3 수험생이다.
고3이니 혼자 공부도 하고, 쉬기도 하라고 앞 원룸을 내주었지만,
거기선 사실 잠만 자고, 저녁엔 늘 우리 방 쪽으로 넘어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밝게 지내고, 또 요즘 또래답지 않게 명량하게 지내는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걱정도 되는 게 사실이다.
내가 동생에게 바라는 것은 높은 성적표도, 대회 입상 경력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은 동생이 원하는 대로 해주려고 했고,
오늘은 공부했느니, 혹은 연습을 했느니 따져가며, 마치 보상을 주는 듯이 무엇을 해주지 않았다.
잘했든, 못했든 그저 시간이 되고, 기회가 되면 동생이 원하는 것을 해주었다.
다만, 적어도 고3이니 만큼 조금은 긴장감을 가지고, 본인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할 것을 빼놓지 않고 늘 강조했다.
그러다가 한 번 일이 터졌다.
한 번은 우리 부부와 밖에서 재밌게 놀고 들어와서 내일까지 수행평가를 준비해야 한다며 걱정하는 것이었다.
재밌게 놀고 와서 우울하게 한숨 쉬며 뭔가를 툭툭하는 둥 마는 둥 '아 이거 언제 다 해..?'하고 있는 동생 모습의 화가 나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였다.
"할 게 있었으면 언니 오빠랑 같이 놀지를 말든가, 아니면 재밌게 놀고 왔으면 지금부터라도 밤새서 하든가. 아니면 그냥 안 하고 내일 학교 가서 혼나든가. 너가 어떠한 일을 하기로 했으면, 그 일에 대한 책임도 너가 감당해야 되는 거야. 재밌게 놀고는 싶고, 숙제도 잘하고 싶고. 누군들 안 그래? 정신 좀 차려라 제발."
사실 한마디가 아니고 여러 마디를 쏘아붙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침대에 누워 한참을 투덜대니 아내가 왜 또 그렇게 심하게 말하냐며 동생에게 갔고, 난 혼자 침대에 누워 떠오르는 예전 일을 회상했다.
아직도 선명한 중학교 때의 일이다.
중학교 기말고사를 앞둔 주말. 아버지 회사에서 에버랜드를 가는 행사가 있었다. 당연히 난 가고 싶었고, 당연히 엄마는 시험이 코 앞이니 안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혼자 가시려고 준비하시다가 날 보더니 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고 하셨다. 가지 않는다고 해서 공부를 할 것 같이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에버랜드로 가서 아버지랑 하루종일 신나게 놀고, 밤이 돼서야 집으로 향했다.
밤에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너무 신이 났던 나머지, 평소라면 안 할 속마음을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아 다음 주부터 시험이라서, 국어도 해야 되고, 영어도 해야 되는데, 언제 하냐~ 망했다.
사실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파장은 컸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오늘의 나처럼 바로 뭐라고 하셨다.
"너가 에버랜드 가서 놀고 싶다고 해서 같이 하루종일 재밌게 논거잖니. 너 놀고 싶은 거 다 놀고 이제 와서 뭘 해야 되고, 시간이 없다. 이런 이야기하는 건 되게 비겁한 거야."
하루종일 들떠 있던 기분은 한순간에 푹 가라앉았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클래식 소리만 한참 가득 채우다가 아버지가 한마디를 더하셨다.
"하루종일 재밌게 놀고 마지막에 이게 뭐니. 시험은 망쳐도 괜찮아. 근데 너가 무언가를 선택했고,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거기에 대한 결과와 책임도 너가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당연한 거야."
참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말하고 있네.
그래. 차라리 이 말을 해주면 동생이 더 알아듣겠구나 싶은 마음과 갑자기 화낸 것도 미안해서 나가보니 이미 아내 도움을 받아 쓱싹쓱싹 또 웃으며 해나가고 있었다.
오빠도 어릴 땐 몰랐는데, 살아보니 정말 아빠 말이 맞더라. 너 행동에 후회보단 책임을 져야 한다는 하려던 말은 못 하고, 괜히 너 때문에 모두가 뭔 고생이냐고 맘에도 없는 말을 하며 옆에서 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참 가족이란 게 그렇다.
외모와 성격뿐 아니라, 참 표현하기 어려운 사소한 부분들도 닮아간다.
아내는 간혹 아버지 이야기 듣거나, 우리 부모님을 만나고 올 때면, 어쩜 아버지랑 오빠랑 성격이 그렇게 똑같냐고 한다. 개인적으론 좋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아내가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 중 아이언맨은 손사래를 치며, "맙소사! 내가 아버지처럼 말하고 있잖아."였지만
사실 난 아빠를 더욱더 닮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면 아빠처럼 되고 싶어서 점점 더 닮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내 동생은 후에 어떨까?
지금은 참 답답하기도 하고, 또 마냥 어려서 얘를 어떻게 하지 싶지만, 또 어느새 의젓하게 자라서 아빠나 엄마를 닮아있을까? 혹은 나의 어떤 부분은 조금이라도 닮아있을까?
뭐가 되었든 후에 "내가 오빠처럼 이야기하고 있네." 우리의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면,
맙소사! 의 반응이 아니라, 이 글을 쓰는 나처럼 조금은 반가운 반응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