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결혼을 준비 중이다.
이제 결혼식이 2주도 채 안 남았으니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났다.
이미 신혼집에서 예비 신부와 같이 생활하며 싸우기도 싸우고, 붙어있기도 더 붙어있는 중이다.
다만, 다른 신혼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신혼집엔 또 한 명의 식구가 있다는 것이다.
난 2020년 제주로 떠났다 2024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제주로 떠날 때, 우체국을 통해 6호 박스 6개로 모든 이사를 마쳤는데, 다시 서울로 이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올라올 때도 짐은 우체국 박스로 6박스 정도.
그래도 3년이란 시간 동안 나름대로 참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가지고 올라올 짐은 많지 않았다.
가진 것 없이 떠나고, 돌아올 때도 가진 것 없이 돌아왔지만,
그래도 이번 서울로의 복귀엔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한 단어만으로도 설명이 되는 이유.
수많은 작고 큰 고민과 이유가 있겠지만, 이것이 서울로 올라온 이유다.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만나던 여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난 3년간의 정든 제주를 떠나 다시 서울로 왔다.
그렇다.
가진 것 없이 다시 서울로 왔지만,
이곳 서울엔 참 많은 짊어져야 할, 아니 함께 가야 할 사람들이 생겼다.
사람이라 하지 않고, 사람들이라 함은 나의 예비 신부 외에도
나의 작은 집에 같이 살아갈 또 한 명의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나의 나의 늦둥이 여동생.
부모님이 시골로 목회를 떠나시면서, 어떻게 보면 나의 늦둥이 동생은 덩그러니 서울에 혼자 남겨졌다.
아는 목사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부모님께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고등학생이 느끼는 외로움과 불편함을 다 채울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오빠가 제주에서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동생 학교 근처의 직장을 잡아서.
그곳이 곧 신혼집이 된다는 것 말고는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부모님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에 선뜻 이야기하지 못하시고,
내 눈치만 보시다 하신 말씀이라곤,
어디 근처 원룸이라도 잡아주면, 밥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겠냐는 조심스러운 제안뿐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늦둥이 동생이기에, 혼자였다면 고민할 것 없이 당장에 들어오라고 했겠지만,
이제 곧 신혼집이 될 곳에 고3 수험생을 들인다는 것은
나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예비신부에게 이러한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기에
쉽게 말도 못 꺼내고, 혼자 끙끙 거리며 있다가 이기적 이게도 결국엔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근처에 동생 방을 하나 잡아주면, 우리가 좀 같이 밥도 먹고 케어할 수 있을까?"
평소보다 조심스레 건넨 나의 말에 예비 신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슨 방을 잡아줘 고등학생을. 그냥 여기 와서 같이 살면 되지.
다른 방법도 없잖아. 난 괜찮아
입장 바꿔 내 동생이 그런 상황이면, 오빤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 예비 신부의 말에
"난 좀 불편할 것 같아서 더 그래." 그만 솔직하게 이야기해 버렸다.
그런 상황이 되면 또 다를 거라며, 자긴 괜찮으니 동생 들어오려면 필요한 물품들을 알아보자며 말하는 그녀.
이미 평생을 아껴주며 잘해주겠다 다짐했지만, 더욱더 굳건하게 다짐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 후에도 많은 대화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지금 우리의 신혼집엔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고3 수험생 한 명.
매일 날 괴롭히지만, 그렇기에 더욱 힘이 되는 나의 예비신부 한 명.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글과 책엔 셋이서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을 담아볼 예정이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가족이 주는 행복과 만족감 그리고 위로를
또 가족이기에 오히려 더 어려운 고민들까지.
소소하고 작은 일상 속에서 내가 위로받고 있듯,
누군가도 우리의 작은 기록들이 짧은 위로가 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되고, 공감이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