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이야기를 소설로 씁니다.
엄마, 아빠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일도 재미있는 일도 없는 그렇고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열여섯. 떨어지는 낙엽에도 볼이 불그레해지던 시절, 이유 없이 이웃집 앞을 서성이며 인기척을 확인했지만 모두 일터로 나가고 비어있는 집은 고요했다. 대문 옆 기둥에 목줄을 매달고 있는 복실이 마저도 8월의 푹푹 찌는 더위에 기력이 없는지 시큰둥하게 쳐다본다. 성숙이는 어제도 오늘도 대문밖을 서성이는 연심이의 행동이 영 수상쩍었지만 그 속내까지 다 헤아릴 수는 없었다.
"왜. 정애 아지매 집에 뭐 숨겨놨냐?"
"숨겨 놓을게 뭐가 있다고 그러냐?"
성숙이는 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 뭔가를 안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춘다.
"그럼 왜 자꾸 아지매네 집을 훑어보냐? 족제비 맹키롬"
들켜선 안 될 비밀이 드러난 듯 연심이는 움찔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해라. 나 내일은 집에 있을라니까 그렇게 알아라"
"그럼 내가 올까?"
"아니 내일은 종심이랑 놀라고, 엄마 심부름도 해야 하고"
"지가 언제부터 엄마 심부름을 그렇게 잘해 쌌다고. 알았다."
정애 아지매 집에 손님이 온 것은 며칠이 지나서였다. 친구들과 동네 어귀를 지날 때 멀리서 걸어오는 두 남자가 보였다. 한 사람은 익히 보던 종심이 오빠 성철이었고, 그 옆엔 키가 두 뼘은 더 큰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낯선 실루엣만 보아도 자기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년 전 집 앞에서 잠시 스치고 난 후 마음속에 자라난 그리움의 크기만큼 그의 키도 한참이나 더 큰 것 같았다.
"오빠, 누구다요?"
"니 정남이 모르나? 노화에 사는데 방학이라서 놀러 왔단다. 연심이 니는 알제? 니네 옆 집 정애 아지매 조카인데"
"알지라"
"그럼 인사해라."
정남이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흠칫 놀라는 눈치더니 짧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그래 그럼 놀아라. 우리는 할 일이 있어 가야 하니께."
성철이 오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심이의 얼굴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성숙이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킥킥댔다.
"염병하네. 한여름인데 니 얼굴은 왜 홍시 맹키로 빨개지냐. "
"내 얼굴이 뭐 어디가 어떻다고 그러냐."
괜히 버럭 했지만 목소리를 덜덜 떨렸다. 그런 연심이의 속내를 다 읽었다는 듯 성숙이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궁금하면 집에 가서 거울이나 봐라. 어디가 어떤지"
작년 이맘때였던가? 방학이면 어김없이 고모집에 와서 사나흘을 묵다 가는 정남씨를 처음 본 날을 연심이는 잊을 수가 없다. 일찍이 해남에서는 본 적이 없는 미남에 키는 또 어찌나 큰지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한 뼘은 더 커져서 나타나니 부끄러워 그와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지만 연심을 내려다보며 인사하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눈과 코와 입의 생김새를 상상했다. 그녀의 마음은 단박에 사로잡혔다.
겨울방학에도 잠시 다녀갔다는데 만나지 못했고 1년이 지나서야 얼굴을 다시 보게 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는 친구들에게도 꼭꼭 숨겨둔 마음이었는데 오늘 어울리지도 않게 붉어진 얼굴로 다죄다 들통이 나버렸다. '이렇게 된 김에..... 그냥 내거로 만들어버리자.'
"정남씨는 이제 내꺼다. 건드리지 마라"
"하이고 정남이 오빠가 니꺼 한다대?"
"너는 친구 맞냐? 도와줘도 시원찮을 판에 시작부터 찬물이냐?"
"알았다. 알았다. 우리 오빠한테 잘 말해줄게."
"너 그러기만 해봐라. 오빠한테 말하면 다시는 너 안볼거여"
"그럼 어쩌라는거냐? 니꺼라며. 언니들이 먼저 지꺼라고 하면 어짤라고 그러냐"
"그냥 있어봐. 다 생각이 있응께."
그날 이후 우연을 가장한 연심이와 정남씨의 만남이 계속되었다. 정남씨는 이런 연심이가 귀여웠다. 눈치 없는 사내라도 알만한 얄팍한 꼼수들이었으니, 모른 척 해주가 민망해 섬으로 떠나기 전 주소가 적힌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네는 것으로 정남씨는 정말 연심이의 것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펜팔은 둘의 마음을 잔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이어줬다. 편지를 써 놓고 집배원 아저씨를 기다리는 시간은 끝없이 길었고 답장은 기다리는 시간은 더 지리했다. 그럼에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종이에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담는 것밖에 없으니 평범한 그저그런 하루가 글이 되고 시가 되었다. 사랑을 하는 여자의 눈에는길가의 돌멩이마저도,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마저도 빛나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정남씨는 섬을 떠날 거라 말했다. 편지를 주고받은지 이태쯤 되던 날 되던 날, 자리 잡을 때까지 얼마간 연락이 안 될거라는 마지막 소식을 전해왔다. 하지만 붙잡기엔 이미 늦었다. 편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어느새 훌쩍, 어딘가로 떠나버렸으니.
열여덟살 연심이의 가슴 속에 '그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어서 두려웠지만 그것만큼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성숙이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