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를 읽고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다.
(열역학 제1법칙)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법칙)
엔트로피는
시스템의 무질서 또는 불확실성을 나타내는 상태 함수,
우주 내 어떤 시스템에서 존재하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형태로 바뀌는 정도를 재는 척도를 말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면 시스템의 에너지 효율이 감소하고, 무질서가 증가한다.
엔트로피란 에너지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마다 내는 일종의 벌금이며 쓰레기이다.
거기다 비가역적이라 다시 유용한 에너지로 되돌릴 수 없다. 그런데 우주의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턴은 우주를 커다란 기계로 보았다. 모든 현상은 기계적인 원인과 결과로 설명될 수 있고 역학의 과학적 법칙을 이용해 인간의 물질적 이익이 증가되도록 자연을 재배열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더 많은 물질적 부가 축적될수록 세계는 더욱 질서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술적 진보는 물질적 풍요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이 되며 이 물질적 풍요는 결국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의 등장으로 뉴턴의 기계론적 사고관은 한계에 부딪힌다.
소립자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립자의 본질 때문에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관찰대상을 고정하고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주 1)
예를 들어 전자의 위치 또는 속도 중 하나는 측정할 수 있지만 두 가지 모두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 서로 관련된 두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원리
모든 사물 하나하나는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쉴 새 없이 변환된다. 변환이 일어날 때마다 그 과정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인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뉴턴 역학에 의지해온 세계관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만다.
엔트로피적 세계관의 시작이다.
고 엔트로피 사회에서는 화석 연료와 재생불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며 고도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추구하므로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이 필연적으로 가속화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고 에너지를 뽑아내고 처리하는 것은 더 어려워지므로 에너지 변환비용이 올라간다. 이것이 물가 상승,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삶의 주요 목표는 에너지 흐름을 이용하여 물질적 풍요를 만들어내고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떨어지고 우리의 몸이 주변환경으로부터 괴리되는 이원주의가 세상을 덮게 된다.
저엔트로피 환경에서는 인생의 목표가 완전히 달라진다.
저엔트로피 세계관의 윤리적 기준은 에너지의 흐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저엔트로피 사회는 물질적 소비를 줄일 것을 강조하며 검약은 중요한 덕목이 된다.
물질주의 대신 개인적이고 내적인 성장을 중시하는 태도, 생태적인 관심을 가진 존재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사회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세계의 전체적 무질서는 항상 증가하고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감소한다.
유한한 자원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 엔트로피적 세계관을 가지고 자원을 보전하고 자연의 리듬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만 보고 이 책을 물리학 도서로 알고 산 사람은 나뿐이었을까.
매일 새벽 맛있는 음식을 숨겨놓고 아껴 먹듯 조금씩 나눠 읽었다. 새벽에 만나는 엔트로피 세계관이 재미있어 내 나무의 가지는 때론 양자역학으로 때론 철학으로 뻗어 나갔다.
이 책은 물리학을 가장한 사회학이었고 사회학을 가장한 환경학이었고 환경학을 가장한 인문학이었고 인문학을 가장한 철학이었다.
강물이 굽이쳐 흘러 다른 강물을 만나도 결국 바다로 귀결되듯 물리학도 사회학도 환경학도 결국은 인문학을 만나고 철학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았다.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형태로 바뀌는 정도를 재는 척도인 엔트로피는 자신이 개발한 기술에 의해 현대화되고, 기계화된 사회에서 더욱 소외되고 힘들어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에너지를 사용할수록 증가하는 엔트로피는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런 엔트로피를 낮추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적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는 것이다. 물질을 버리고 형이상학을 선택하는 저 엔트로피 환경에서는 삶의 관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적게 소유한다'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소유하지도 소유당하지도 않는 사람이 결국 최선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소유하는 것들은 결국 우리를 소유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거기에 집착한다.
소유물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에서 읽었던 문장을 엔트로피에서 발견했다.
양자역학이 물리학자가 가지던 확신과 과학 법칙이 주는 명쾌함을 겸손함으로 변화시켰듯 엔트로피적 세계관이 현재 우리의 삶에 던져주는 시사점이 크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가 모두 동감하는 불멸의 지혜가 있다. 그것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우주의 형이상학적 전체와 하나가 될 때 느끼는 해방감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AI가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지금, AI를 사용하기 위해 엄청난 전기를 사용하며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건 차치하고 저 엔트로피를 실현하는데 꼭 필요한 형이상학이 사라지고 있다.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던 인간이 생각도 하기 전에 AI에게 묻고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가 고갈되기 전에 우리의 정신의 먼저 고갈될지도 모르겠다.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시골에 머물며 도시화와 산업화된 공간을 벗어나 삶의 질적 향상을 꾀하는 것은 우리도 모르게 엔트로피를 낮추는 행동이었다.
엔트로피의 개념은 몰랐지만 급속한 사회 발전으로 생기는 엔트로피를 낮추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 과학이 사물의 형이상학적인 '왜'를 탐구하는 학문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발전된 과학 안에서 형이상학적 질문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과학과 자연을 통제할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과학과 자연을 통제하려 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 엔트로피 과정을 역행시킬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방식과 행동양식이 철학의 필터를 거친다면 지구상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속도와 방식을 수정할 수 있다.
새벽독서를 하며 모든 활자 하나하나가 영혼의 에너지로 변하며 이것이 나의 성장으로 변환되고 있음을 느낀다. 변환이 일어날 때마다 내 주변 공기와 관점과 시각이 재정비된다.
독서를 하며 내 사고의 흐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향해 속도를 조절한다. 한 지점에 머물며 속도가 느려질 때 나의 사고는 조금 더 고양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자원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내가 만드는 엔트로피가 최소화되도록 소비적 행동에는 자발적 단순성을, 독서와 사유에는 자발적 복잡성을 부여해 본다.
(주 1) 하이젠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