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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느 Feb 03. 2023

남의 돈을 쓴다는 것, 번다는 것

열한 번째 | 연말 스픽에서 살아남기

12월 마지막 주가 되자 늘어나는 예산에 압도되어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구독 서비스의 경우 무료체험 기간을 고려하면 12월 마지막 주에 투자하는 마케팅 비용은 한 주 뒤엔 1월에 회수하게 된다. 이 말은 12월 마지막 주에는 그 효율의 운명을 새해의 신에게 맡긴 채 평소 대비 n배의 예산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지난 7년간 컨텐츠 에디터부터 브랜드 마케터, 커머스 마케터 등등 다양한 직무를 거쳤지만 그 중에서도 퍼포먼스 마케터만큼 애달픈 직무도 없는 것 같다. 퍼포먼스 마케팅이라 함은 'Paid' 매체를 운영하며 광고비 대비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일일텐데 말 그대로 회사의 피같은 돈을 써서 황금같은 돈을 몇 배는 벌어와야 하는 일인 것이다. 


처음 퍼포먼스 마케팅을 할 때에는 돈을 쓴다는 것 자체가 신이 났다. 

돈을 쓰면 사람들이 내 컨텐츠를 좋든 싫든 본다는 게 신기했고, 내가 원하는 타겟에게 내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 액수가 점점 늘어나고, 관리하는 매체가 늘어나다 보니 돈을 쓰고 더 큰 돈을 벌어온다는 것 뒤에 자리 잡은 엄청난 부담감과 책임감을 마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특히 상위 책임자들은 돈을 썼으니 돈을 벌어와야지 라고 생각한다.(그것도 백번 맞다) 하지만 광고라는 것은 참 이상해서 A매체의 효율을 B 매체가 레버리지 하기도 하고, 어제 잘됐던 캠페인이 오늘은 죽을 쑤기도 한다.


결국 그 성과의 오르내림, 머신 러닝의 최적화의 정도에 따라 우리 애달픈 퍼포먼스 마케터들은 대시보드를 들락거리며 기뻐했다가 좌절했다가 의심했다가 희망을 품었다가를 반복한다. 어제는 1차때 '미쳤다'라고 할만큼 잘 되었던 프로모션 캠페인이 2차가 시작되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1차 때는 연초에 더 가까워진 2차 프로모션을 노리고 예산 상향을 공격적으로 하지 않았던 터였다. 1차때의 성과를 믿고 2차 프로모션이 당연히 더 잘될 거라는 생각을 가진 내 안일함이 잘못이었다. 이미 2차 프로모션을 위한 광고비 중 하루 분량(이마저도 꽤 컸다)이 소진된 후였고, 나는 정신줄을 붙잡아야 했다. 


회사 바로 앞에 있는 선릉과 정릉 티켓을 끊고 들어가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걸었다. 

처음엔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내가 어떤 액션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산책이었는데 그 생각은 점차 '내가 어쩌다 이번 생에 마케터가 되었는가' '남의 돈을 쓰고 남의 돈을 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등 다양한 원망과 생각들로 번져나갔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이런 고충을 털어놓을 때마다 종종 '남의 돈인데 뭐 어때, 너 돈도 아니잖아'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안일한 생각이 나를 좀 먹고, 결국엔 내 일에 대한 태도와 존엄성을 해칠 거라고 믿는 것 같다. 내 돈이 아니기에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머니를 단단히 단속해야한다.


그것이 2억 만리 떨어진 미국 땅에서 코너가 돈을 쓸 권한과 책임을 준 이유이고, 나는 이 부담스럽고도 괴롭고, 도망치고 싶고, 매일 예산을 조정할 때마다 손이 덜덜 떨리는 이 과제를 너무나 잘해내고 싶다. 적어도 광고비를 많이 집행해본 마케터가 아니라, 어떤 예산의 규모든 남의 돈 귀한 줄 알고 10원 한 장이라도 알뜰히 살뜰히 쓴 마케터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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