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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느 Jan 01. 2023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용기(1)

세번 째 | 연말 스픽에서 살아남기

처음 스픽에 왔을 때에는 뭔가 보여줘야할 것 같고, 어떤 답을 내놔야할 것 같은 부담감에 시달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마케팅 7년차인 나는 스픽에서 꽤 경력직에 속했고, 회사에서 나가는 모든 마케팅 비의 90%를 혼자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질문에든 답을 해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지금까지 해오던 마케팅을 계속 한다고 해도, 완전히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프로덕을 마케팅하는 것은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전 직장에서 참 진하고 강렬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픽에서는 이전 직장에서의 일이 마치 전생처럼 느껴졌다.


데이터는 어떻게 어디까지 심어져 있는지, 도메인은 usespeak.com 인지 speak.com인지 이걸 왜 혼용하고 있는건지, 가장 중요한 앱의 지표는 무엇인지 내가 알아가야 하는 것도 산더미 같았지만 결정적으로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것'들이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일을 다시 배우는 신입의 마음으로 여기저기 동냥하듯 물어봐야했는데 그런 상황들이 너무 괴로웠다. 실질적 나의 시니어 마케터였던 민규님에게 '민규님..'이라고 슬랙을 보낼 때마다, 민규님이 힘겹게 설명해준 그 말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마다 나의 인지 능력을 의심하고는 '그냥 알았다'고 말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연말이 가까워 오자 우리는 내년도 목표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 세우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목표 설정과 전략 수립' 마케터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매월/분기/매년 마다 세우는 것이기에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동안은 회사에서 내년 목표는 'N배'라는 것이 정해지면 거기서부터 탑 다운으로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는 마케팅 예산이 얼마가 필요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지되어야 하는 마케팅 효율이 목표가 되는 Top-down 식으로 세우곤 했었다.


하지만 스픽이 요구하는 목표 설정과 전략 수립은 내가 생각하던 차원의 일을 뛰어 넘었다. 스픽은 목표를 설정할 때 그 목표가 Top-down은 물론, Bottom-up으로도 관통할 수 있어야 했고 그 목표는 전략(Strategy)를 기초로 세워져야 했다. 


또 모든 전략에는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보는 증거(Validation)가 따라 붙어있어야 했다. 그리고 가장 큰 관문은 그 모든 전략과 증거를 바탕으로 샌프란 본사를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사실 Top-down 이든 Bottom-up이든 숫자적인 목표는 얼마든지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마케터에게 미래를 예측하고, 이 돈을 쓰면 이만큼의 돈을 벌 수 있다고 약속하는 일이 (그것도 대표한테) 어디 쉬운 일인가. 전략 회의 때마다 나는 전략을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코너는 '그래서 전략이 무엇인지' 'validation은 있는지'를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내 머리 속은 하얘지고, 코너는 매번 듣고싶은 대답을 못 들어서 답답하고, 나는 나대로 지치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날 코너가 나에게 1월 마케팅에 대해 모델링을 해오라고 했고, 여기서 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도대체 목표 설정과 전략 수립이 뭐길래 모델링까지 해야하는 것이며, 그 모델링은 무엇이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울고 싶었다.


그때 처음 서울 팀원들에게 '모르겠다'고 말했다. 

코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내가 줄 수 있는 것인지 진짜 모르겠다고. 어떤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나라서 문제인 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울 팀에서는 그 일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전략과 증거를 찾을까봐 점점 코너와의 대화를 피하게 됐다. 이러면 안되는 걸 알지만, 목표 설정 같은 거 그냥 마음 속으로 몰래하고, 은근슬쩍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스픽은 역시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내가 한 없이 작아지고 숨으려고 자세를 막 잡았을 무렵 정말 뜻밖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쳐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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