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불구경, 그리고 싸움구경이라고 하던가요?
불구경은 어렵지만 오늘 싸움구경 하나는 확실하게 시켜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 출발하실까요?
베토벤은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남겼는데요,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하고 자주 연주되는 곡이 5번 봄 소나타와 9번 크로이처 소나타입니다. 이 두 작품은 특히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걸작으로 꼽고 있지요.
그중에서도 9번, 크로이처 소나타의 1악장은 참 재미있습니다. 음악 속에서 한 부부의 처절한 싸움의 현장, 그리고... 쉿! 죽음과 절규까지도 엿들으실 수 있거든요... 무서우시다고요? 이번 글은 애들은 가라! 15세 미만 열람금지입니다!
베토벤은 이 곡을 1802년부터 1803년에 걸쳐 작곡하였습니다. 흔히 베토벤의 '걸작의 숲 시기'라고 하는 때에 쓰인 명작 중 하나이지요. 제목이 <크로이처 소나타>라고 알려져 있는데 크로이처,라는 이름은 사실 당시 프랑스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름입니다.
이 사진에 계신 분이 당대의 유명 바이올리니스 루돌프 크로이처입니다. 이 분께 헌정된 곡이기 때문에 이 분의 이름이 붙어있어요.
그러나 원래는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조지 브리지타워>에게 헌정하기 위해 작곡된 곡이라고 해요. 그런데 베토벤과 브리지타워의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 있어서, 변덕이 죽 끓듯 했던 베토벤이 주려고 결심했던 곡을 빼앗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여자문제로! 틀어졌다고 하지요. 그만 브리지타워에게 삐쳐버린 베토벤이 '이 놈 안 주고 딴 놈 준다.' 며 당시의 명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크로이처라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이 곡을 던집니다. 베토벤은 그 해 프랑스 파리에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크로이처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거든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행에서는 현지인 친구가 최고니까요.(웃음)
이 크로이처란 사람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다시 잠깐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이 곡의 1악장을 들어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어딘가 긴장감이 넘칩니다. 격동적이고, 처절하고, 분노마저도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곡을 그렇게 느낀 사람은 비단 저희들 뿐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도 이 곡을 듣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요.
러시아의 대 문호이자 종교사상가이기도 한 톨스토이는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듣고 1890년 같은 제목으로 소설을 발표합니다.
톨스토이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 중 하나인 이 소설은 포즈도누이셰프,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차 안에서 만난 주변의 승객들에게 고백하는 형식으로 서술이 되는데요. 주인공의 아내가 한 바이올리니스트와 이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하다가 눈이 맞는다는 불륜 치정 소설입니다.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륜이란 매우 클래시컬한 소재임이 틀림없습니다.(웃음)
소설 속에서 포즈도누이셰프는 자신의 아내가 바이올리니스트와의 불륜에 빠진 모습을 목격하고 강한 질투에 불타는 상태에서 이 곡을 듣게 됩니다. 크로이처 소나타의 멜로디는 주인공의 질투와 분노를 자극하게 되고, 괴로워하던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아내를 칼로 찔러서 죽이고 맙니다. 즉, 소설 속에서 크로이처 소나타는 '불륜의 매개체'이며 곧 '살인의 매개체'로서 작용을 하지요.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인 시각을 보입니다. 여성들, 특히 당대의 상류층 여성들의 삶을 창녀의 삶에 비교하면서 사랑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고, 결혼이란 섹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사기행위라고 표현하며 격하게 비난하지요. 실제로 젊은 날의 톨스토이는 성적으로 매우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결혼 후 부인과의 사이에 8남매를 낳고 50년 가까이 해로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안 좋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대문호 자신의 성과 결혼에 대한 불신감이 소설에 강하게 나타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과 톨스토이의 이 소설을 접하고 몸이 근질근질했던 또 다른 예술가가 있었으니.... 1901년에는 이런 작품이 세상에 탄생합니다.
프랑스의 화가 '르네 프랑수아 자비에 프리네' 역시 동명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림을 잘 보시면 남성 바이올리니스트와 여성 피아니스트가 격렬한 입맞춤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아니스트의 한 손은 아직 피아노에 있고, 남자 바이올리니스트 역시 오른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지만 왼손에는 바이올린과 활을 든 채로 입니다. 아마도 상당히 급했나 봅니다.(웃음) 두 사람에게는 악기를 내려놓을 시간조차 없었던 모양이지요.
톨스토이의 소설 속 불륜의 현장을 르네 프리네라는 화가는 이렇게 작품으로 나타냈습니다.
자, 그렇다면 드디어! 이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주인공인 바로 그 곡,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소나타 1악장을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애들은 가라! 처절한 부부싸움의 현장에 동행하실 준비가 되셨다면, 들으시면서 읽어주세요!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음악은 정신을 고양하지 않는다. 그저 정신을 자극할 뿐이다.>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썼는데요. 이 곡을 들으면 그 표현이 좀 공감이 갈 것 같습니다. 아름답지만 자극적인 음악이 느껴지실 거예요.
1악장 시작 부분을 베토벤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로 지시하고 있습니다. 아다지오는 '느리게'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소스테누토는 음을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끌어서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조심스레 시작하는 음악의 도입 부분은 마치 거대한 태풍전야처럼 느껴집니다.
도입부를 지나면 서로의 감정이 조금씩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바이올린이 따박따박 따지기 시작합니다. 2분 정도 무렵부터 바이올린의 분노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피아노는 결코 지지 않습니다. 두 악기의 싸움은 스릴과 긴장이 넘칩니다.
곡의 진행을 계속해서 들어보시면 조금 누그러진 듯하다가도 또다시, 감정이 오히려 비뚤어져서 치닫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싸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번 비뚤어진 감정들로 싸움이 엉키게 되면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지지요. 이 커플의 싸움은 엉키고 설키며 자꾸만 자꾸만 극으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분 20초 부분에서 사건은 일어나고 맙니다. 길게 빠지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시나요.
어떠세요? 곡의 이 부분은 분노와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칼로 상대를 찌르고 만, 바로 그 장면처럼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칼에 찔린 피아노는 힘겨운 듯 마지막 말들을 이어가고, 그리고 바이올린이 절규합니다. 여기에 대사를 붙인다면.. '죽이려던 건 아니었어! 내가 널 죽이고 말았어! ' 정도일까요? 사랑하는 아내를 죽이고 만 한 남자의 비통한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후반부 역시 전반부와 비슷한 싸움과 절규가 오고 가며 곡이 진행이 됩니다.
베토벤, 톨스토이, 야나체크, 그리고 르네 프리네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와 음악사, 문학사에 남는 대걸작 들을 한 번씩 살펴보았는데요, 재미있으셨나요? 이쯤 되면 이 거대한 작품들의 한 복판에 있는 크로이처란 바이올리니스트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 않나요?
정작 이 분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요. 난폭하고 무식한 곡이라고 말하며 18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브리지타워는 이 곡을 헌정받지 못한 걸 평생 안타까워했는데 크로이처는 이 곡의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곡을 비난한 크로이처는 사실 작곡가이기도 했는데요, 오페라나 바이올린 협주곡을 직접 작곡했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현대에까지 남아 연주되는 건 거의 없습니다. 그의 작품은 인류의 역사와 시간을 넘지는 못했지요.
그런 그에게 저는 이 말을 들려주고 싶네요. 크로이처 님, 님이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베토벤의 곡 때문에 지금 당신은 음악사와 문학사에 영원히 남는 인물이 되었군요! 그렇지 않으면 200년이 지난 지금의 당신은 레알 듣보잡이라고요, 베토벤에게 고마운 줄 아세요!라고! 그죠?
베토벤과 톨스토이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작품은 음악사에도 또 있습니다.
체코의 작곡가 야나체크(Leos Janacek)의〈현악사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String Quartet No.1 'Kreutzer Sonata')이지요.
69세의 할아버지 야나체크는 무려 38세나 연하인 유부녀 카밀라에게 반하는데요. 그때 쓴 곡이라고 해요.(이 철없는 노인네 같으니라고) 야나체크가 카밀라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톨스토이가 크로이처소나타에 쓴 듯한 가엾은 여인에게의 마음>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라는 말이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뭐, 이러나저러나 살짝 위험한 감정을 자극하는 곡임에는 틀림이 없나 보군요! 혹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들을 때는 조심하자고요!
그럼 또 다음 편에서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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