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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Oct 22. 2023

슈퍼맘 예술가, 갓생러의 삶과 사랑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1819.09.13~1896.05.20)

어쩌면 미모마저도 빼어난,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클라라 슈만입니다.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이자, 요하네스 브람스의 필생의 뮤즈였던 여인.

... 이라고만 아셨나요?


사실 그녀는 독일 낭만초기 음악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대모이자 구심점과도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19세기는 여성의 작곡이나 활발한 연주활동이 적극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유럽에 그 이름이 알려질 정도의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였고뛰어난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슈만과 브람스의 곡들을 세상에 널리 알린, 권위 있는 해석자이자 편곡자 이기도 했지요.


뿐만 아닙니다. 무려 여덟 아이의 엄마였지요! 남편 슈만에게는 내조의 여왕이었으며, 남편의 제자 요하네스 브람스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동시에 받는 덕망 있는 인물이었답니다.


이런 슈퍼맘 슈퍼걸이 어디 있느냐고요?

정말 웬만한 워킹맘들은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은 그녀의 인생!

엄친딸로 태어나 신동, 알파걸을 거쳐 슈퍼맘으로 살았던, 오늘은 클라라 슈만이라는 여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니다.



엄친딸, 클라라 비크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1819년 9월 13일, 독일 라이프치히의 한 음악가 집안에서 클라라 비크가 태어납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교사였으며 후일 남편이 될 로베르트 슈만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어머니 마리안 트롬리츠는 성악가이자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클라라의 부모님은 일찍이 이혼을 하고, 클라라는 5세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납니다.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한 사람으로 클라라를 철저히 통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 (45세, 1830년경)

  클라라는 어릴 때부터 천재 소녀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찬찬히 쌓아갑니다. 1828년, 9세 때 라이프치히 게반트 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며 데뷔하고, 14세 때는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으며 16세 때 그녀의 곡이 초연됩니다. 아름다운 미모와 재능과 실력을 두루 갖춘 그녀는 그야말로 엄친딸, 여류 피아니스트로서는 아이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녀의 곡을 초연한 지휘자는 엄친아 멘델스존이었다고 하네요.



클라라 비크, 사랑에 빠지다.

  

이 청초한 미모 좀 보소

  유럽에서 주목받는 피아니스트가 된 17세의 아리따운 클라라. 그녀가 지금 사랑에 빠져 있는 상대는 아빠의 제자입니다. 무려 9살이나 연상이지요. 로베르트 슈만이라는, 당시에는 무명의 듣보잡이었던 음악가입니다.

내한테 듣보잡이라 했나? 확 그냥 마~ / 아돌프 폰 메첼이 그린 로베르트 슈만의 초상


  1837년 8월 13일~15일간에 클라라와 로베르트 슈만이 서로의 미래를 약속하며 교환한 편지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로부터 1개월 후인 1837년 9월 13일, 클라라의 18세 생일에 슈만은 청혼을 합니다. 아빠 비크 교수는 노발대발합니다.

  그도 그럴만합니다. 제자 로베르트 슈만은 돈도 없었고, 집안이 짱짱하지도 않았으며, 무명이었고, 곧 서른을 바라보는 노총각이었거든요. 뿐만 아닙니다. 당시 슈만의 여성편력과 문란한 생활은 세간의 입방아에까지 오르내리곤 했기 때문입니다.... 오우, 쓰면서도 한숨이 나오는군요. 부인도 없이 홀로 애지중지 키운 내 소중한 딸이 저런 개뼉다귀 같은 늙은 도둑노무 쉐리와 결혼한다고 하니, 아빠로서는 당연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요. 게다가 내 딸은 이미 전 유럽의 아이돌급 피아니스트인데 말입니다. 아빠 비크교수는 열혈 반대를 하며 슈만을 미성년자 유괴 죄로 고소를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장애가 있는 사랑이 더 불타오르는 법인가요,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클라라와 슈만은 반대하는 아버지를 법정에 맞고소하기에 이릅니다. 주위에서 보기에도 눈꼴사나운 가족 간의 법정 투쟁... 결국 승소한 쪽은, 클라라와 슈만이었습니다. 패소한 아버지 비크 교수는 슈만에 대한 중상모략죄목으로 18일간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불과도 같은 반대를 뒤로하고,  1840년 9월 12일, 클라라의 스물한 살 생일 전 날,  클라라와 로베르트 슈만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비크 교수와 클라라는 그로부터 3년 후에는 화해를 합니다. 근데 왠지 아버지 좀 가엾…)


난 이 결혼 반댈세~



슈만과의 결혼생활

  로베르트의 창작력은 이 무렵에 절정에 이릅니다. 클라라와 결혼한 1840년 한 해 만에 무려 183곡을 작곡했을 정도니까요. 꼭 이 해의 일이 아니더라도 로베르트 슈만의 일생을 통틀어 클라라라는 여인의 사랑과 내조는 그의 엄청난 창작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이 클라라에게 가져다준 것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흠, 조금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갓 스무 살에 9살 연상의 아저씨(?)와 결혼한 클라라. 일단 이들 부부는 15년의 결혼생활동안 무려 4남 4녀를 낳습니다. (그중 장남 에밀 슈만은 돌이 되기 전 사망합니다.) 클라라에게 있어서 꽃 같은 20대였던 1840년대는 그냥 내내 임신 중이었다는 거지요. 재미있는 것은 아이 욕심이 있는 쪽은 남편 슈만이었고 정작 클라라는 아이는 3-4명이면 충분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남편 로베르트는 클라라를 매우 사랑했으며 슈만 부부는 음악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결혼 초기의 로베르트는 본인이 클라라보다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며 음악가로서의 열등감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 열등감 때문이었을까요. 로베르트는 클라라가 집에서 피아노 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클라라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당시 클라라는 여섯 명의 아이를 로베르트의 도움 없이 거의 홀로 돌봐야 했는데요. 육아해 보신 분들 아시죠? 세상에 아이를 하나만 제대로 키우기에도 24시간이 부족한 것이 엄마의 삶인데, 클라라는 일곱 아이의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논스톱으로 소화하면서, 가사 노동과 남편의 음악 파트너로서의 내조까지 해 냅니다. 게다가 당시 로베르트의 수입만으로 일곱 아이를 키우기는 버거웠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위한 작곡과 연주활동도 병행합니다. (아무리 품위 있는 그녀라 할지라도 분명 현타가

씨~게 오는 순간이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우쒸, 돈도 내가 더 잘 버는데 말이야...)  

MZ용어로 갓생러라고 하나요? 갓생러든, 슈퍼맘이든 알파걸이든, 그녀 앞에서는 다 초라하게 느껴지는군요.


로베르트와 클라라의 아이들 (자료출처 : 위키피디아)

24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을 클라라의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작곡은 내게 큰 기쁨.

그런 창작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생활 속에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모든 것을 잊고 몰두할 수 있기 때문에."


... 육아맘 육아대디들은 절절히 공감하시겠지요.



남편 로베르트, 라인 강에 투신하다

 그런 클라라의 인생에 더욱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남편 로베르트 슈만이 1950년 무렵부터는 본격적으로 정신병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슈만은 양극성장애, 즉 조울증 환자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양극성 장애를 연구할 때에는 꼭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이기도 하지요. 남편 슈만은 환청을 듣기도, 환각을 보기도 하며 힘든 정신분열 증상에 시달리고, 클라라는 묵묵히 그 곁을 지킵니다.


  1854년 2월 27일, 클라라가 자택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시간, 슈만은 파자마에 슬리퍼 차림으로 홀로 집을 나섭니다. 그는 비틀비틀 라인강으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차가운 라인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병마는 날로 슈만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데, 그는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그만 스스로를 내던진 것입니다.


  ... 차라리 그날 죽기에 성공했더라면,  조금 더 나았을까요? 그의 자살 시도는 미수로 끝납니다. 

지나가던 어선에 구조되어, 슈만은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자괴감, 그리고 부인 클라라와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슈만은 제 발로 정신병원을 찾아갑니다.

이때, 클라라의 뱃속에는 여덟 번째 아이 펠릭스가 있었습니다. (.... 아니 애를 여덟을 남겨놓고 지 혼자 죽겠다니.....)


  클라라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병원에서 무려 2년여를 더 지내던 슈만은 1856년 7월 29일, 엔데니히 정신병원에서 46세의 생을 마칩니다.

슈만이 만년을 보냈던 엔데니히 정신병원 (현재는 슈만기념관)

 

연하남 브람스의 존재

  이 시기,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들었을 클라라의 곁에는 무려 열네 살이나 어린 연하남 브람스가 있었습니다. 브람스는 클라라와 아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그녀의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주었지요.

  이 무렵의 둘의 관계는 음악사의 아름다운 로맨스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우정 앞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세속적으로 들립니다. 사랑을 뛰어넘은 그들의 아름다운 우정은 그들이 죽는 날까지40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었습니다.




예술가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삶

 남편이 죽은 1865년 이후, 클라라는 더 이상 작곡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로베르트와의 사이에 남겨진 일곱 아이들을 혼자 키우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했을 것이고, 시간이 필요한 작곡보다는 수입을 바로 얻을 수 있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클라라는 1897년 마지막 연주회를 가질 때까지 평생에 걸쳐 무려 1300회의 연주회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뜻 19세기의 교통상황들만 상상해 봐도 정말로 바쁘게 살아야 했겠지요. 아마도 타고난 재능과 일머리와 건강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화해 낼 수 있는 스케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활발한 연주활동과 함께 그녀는 남편 로베르트 슈만의 전집을 편집하는 작업도 합니다. 그리고 1878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 호세 음악원에서 교수로 일하게 됩니다. 당시의 독일 사회에서 여성이 교수에 임용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클라라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892년에 은퇴하기까지 클라라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며 고전에서 낭만으로 이어지는 독일 음악을 후세에 알리는 교육에도 다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1896년 5월 20일, 76세의 나이로 클라라는 사망합니다. 평생을 클라라를 존경하고 연모했다고 알려진 대 작곡가 브람스도 그녀가 떠난 이듬해인 1897년 4월 3일 아침, 세상을 떠납니다.




"한때는 내가 창작의 재능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런 생각을 단념하고 말았다.

여성은 작곡하겠다는 바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과거에도 그럴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내가 과연 그것을 바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의 이 일기에는 여성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번뇌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남편 로베르트 슈만이 죽었을 때, 클라라는 겨우 서른다섯 살이었습니다. 1896년 76세에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클라라에게 있어서 작곡가로서의 인생은 그녀 인생의 전반부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시간이었던 것이지요. 클라라의 인생 후반부는 오직 남편의 작품과 그 정통적인 해석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완벽한 기교를 갖춘 음악가이자 작곡가에서 철저하게 가족을 위한 어머니이자 아내로 살아갔던 클라라 슈만. 평생 동안 남편에게 충실했던 정숙한 부인이자 브람스의 존경받는 뮤즈. (이자 철벽녀....)  여러 역할모드를 소화해야만 했던 클라라에게 있어서 자신의 음악 활동은 항상 뒷전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에서 낭만으로 흐르는 시기의 음악계에 미친 그녀의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은 이런 클라라의 일생을 기려 100 마르크화에 클라라의 초상을 넣습니다.


  그녀가 남긴 많지 않은 곡들에서도 그녀의 작곡가로서의 재능과 기량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과 연구자들은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지요. 만약 클라라가 슈만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더 빛나지 않았을까, 클라라가 그 시대의 여성이 아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을 해 볼 수 있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클라라가 없는 로베르트 슈만은 오늘날의 슈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세 개의 로망스

Clara-Jumi Kang: C. Schumann, Three Romances for violin and piano, Op. 22


  이 우아한 곡은 1853년에 작곡된 곡입니다.

  아마도 1853년은 클라라가 조금 행복했던 시기였나 봅니다. 슈만의 투병생활 중 조금 병이 호전되던 해이기도 했고요, 그녀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남편과의 행복했던 시간, 그 시간의 거의 끝자락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때입니다. 슈만 역시 3개의 로망스라는 곡을 작곡했는데요. 슈만이 클라라에게 곡을 헌정하면 또 클라라가 그 답으로 작곡을 하는 형식으로, 둘이서 귀엽게 잘 놀았던(?) 것 같습니다. (후에 이 곡은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에게 헌정되지만 말입니다.)


  또한 1853년은 평생 자신을 사랑해 준 연하남 브람스와 만났던 해이기도 하지요. 1853년에 갓 스무 살의 청년 음악가 브람스를 슈만과 클라라부부는 제자로서 아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브람스 역시 클라라의 정신적 지지와 영향을 받으며 그가 추구하는 음악을 펼쳐갈 수 있었답니다.


 클라라 비크 슈만. 여성 예술가로서 결코 녹록치만은 않았던 그녀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품위를 잃은 적이 없던 강인한 그녀의 삶과 사랑은,  마치 '고전적 낭만' 그 자체와도 같아 더욱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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