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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메아리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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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Dec 06. 2022

읽는 것과 쓰는 것

책 읽는 습관

며칠 전 사고 싶었던 책을 20권이 넘게 한꺼번에 구매를 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책을 구입할 때는 사고 싶은 책은 한 권 내지 두 권만 구입을 하고 천천히 정독을 하고 다 읽고 나면 다시 또 선별한 책을 다시 사는 습관은 성인 된 후에도 변함이 없었지만 소설을 갑작스럽게 많이 사게 된 이유는 읽고 싶은 소설을 고르다가 5권이 되더니 10권이 넘고 금세 20권에 육박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소설책을 구매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자주 소통하는 브런치 작가님의 글을 읽은 후였다.

소통을 통해 문학 소설과 장르 소설을 비교하고 유명한 베스트셀러 소설에 대해 문자로 얘기를 나누고 나자 문득 한참이나 안 읽었던 소설이 갑자기 읽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와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였으니 2년이 넘게 소설을 안 읽은 것 같다.

모르는 분은 안 계시겠지만 올가 토카르추크와 페터 한트케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고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작가인 까닭에 의무? 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페터 한트케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인종 청소에 가담했던 인물이라는 뉴스를 접하면서 예정에 없던 노이즈마케팅 효과 덕택에 더욱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읽고 싶었고 노벨상 수상 직후 미국 뉴스에서는 노벨 문학상을 취소하고 '페터 한트케를 국제 재판소에 넘겨야 한다.' 'He is born guilty(타고난 범죄자)'라는 뉴스가 CNN 비롯한 미국의 유명 방송 뉴스에서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보도된 적이 있었다.

'방랑자'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두 권 모두 재미있어서 읽는 시간이 빨리 갔고 특히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는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소설이 되었으며  읽자마자 '태고의 시간들'을 곧바로 주문해서 읽었다.

이렇듯 필자는 소설을 좋아했지만 요즘은 많이 읽지는 않는다.

흥미 위주의 픽션(fiction)이어서가 아니라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이 산재되어 있는 까닭에 나름 중요하다고 선별한 책을 먼저 읽고 나면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화제의 신간'이 또 있기 때문에 순서 상 자꾸 뒤로 밀렸던 이유이다.

어린 시절의 독서습관은 부모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우는 교육이지만 한글을 떼고 나면 누구나 그림 동화를 읽는다.

나의 독서 교육의 history는 초등학교 1,2 학년에는 세계 위인 전집을 차례 대로 정독하고 시중에 출시된 위인전을 거의 다 읽게 되면 어린이 명작 전집을 한 권,  권 읽어 나갔으며 집에 있는 명작 전집을 다 읽고 나면 4학년으로 진학을 하게 된다.

이때쯤이면 책의 내용과 문맥을 스스로 깨칠 수준이 될 무렵이므로 학교 근처의 서점에서 보고 싶은 책을 직접 사서 보게 된다.

기억하면 초등학교 5,6 학년에는 셜록 홈스가 주인공인 추리 소설을 즐겨 읽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에 틈만 나면 읽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서 책만 보는 책벌레는 아니었고 밖에 나가 동네 친구와 노는 걸 더 좋아했던 소년이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프로야구가 국내 최초로 개막된 시기였기 때문에 전국적인 프로 야구 열풍이 불었던 때였다.

당연히 친구들과 팀을 짜서 각자 집에 있는 소중한 야구 용품들을 가지고 와서 노는 게 우선이었지만 엄격한 가정 교육 탓에 친구들과 게임을 하기 전에 먼저 엄마께 스케줄을 보고 해야 했으나 약속된 게임은 거의 허락하셨다.

대신 일주일에 몇 권의 책은 꼭 읽어야 했지만 노는 것만큼이나 책도 좋아했기 때문에 엄마께서는 독서나 공부를 강요하신 적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엄마는 두툼한 탈무드 전집 3권을 주시며 이제는 탈무드도 이해할 나이가 됐으니 읽으라고 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 보는 두꺼운 책은 펼쳐 보기도 전에 부담도 묵직했으며 세로 활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읽기가 불편했지만 곧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책의 내용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어서 넉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3권 모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누구나 그렇지만 가장 기억력이 좋은 나이이고 흥미를 느끼며 읽었기 때문에 빠짐없이 내용 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베스트셀러 책이 유행했고 화제가 되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이 탈무드 얘기를 많이 했었다.

탈무드 내용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했던 터라 수업 도중 선생님의 탈무드 강의가 순서라도 틀리면 "아닙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그게 아니고 랍비가 말한 것은 이렇습니다."라고 선생님을 강의를 자르고 교정? 하는 경우가 있었던 당돌함 때문에 학생들 앞에서 당황했던 선생님이 날 뚫어져라 바라보시던 표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생각해 보면 사춘기 소년의 반항적 성향이 선생님 기분은 상하게 했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들은 웃겨서 자지러지던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기억력은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교육심리학을 전공하신 엄마의 나이별 맞춤 교육 프로그램은 성공했다고 믿는다.

탈무드를 읽고 난 후 한국 근대 소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근대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국어 시간의 근, 현대 문학에 관한 요약 본 수업이 성에 차지 않았지만 아버지 책장에 꽂혀 있던 근대 문학 책들이 시기적절하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누렇게 갈색으로 바랜 책표지를 펼치자 페이지 모서리 바깥 테두리는 짙은 갈색으로 탈색됐지만 활자는 선명해서 읽는데 지장은 없었다.

옛날 책이라 세로 활자였고 한문은 섞여 있었지만 기본 한자들만 있어서 읽는데 문제는 없었다.

그 당시 학교 교과 과정에 중학생부터 한문 수업이 있었고 수업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뿐이어서 비중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기본 한자는 읽을 줄 알았지만 쓰지는 못했던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처음 읽은 1920년 대 단편소설은 김동인의 '감자' 염상섭의 '삼대' 조명희의 '낙동강'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로 시작해 1920년대 유명한 작품들을 읽어 나갔고 책장에 있는 소설을 다 읽고 나자 유명한 작가의 근, 현대 소설을 연대 별로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흥미있게 읽었지만 시대적 상황이 처절하게 가난했던 서민의 삶이 너무나 비극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나면 갑자기 소주가 당기듯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읽었던 단편소설의 스토리가 전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소설 '감자'에서는 강원도 깊은 산골에 사는 복녀라는 주인공이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고 받아 온 화대로 무능력한 남편을 모신다.

남편은 그 사실을 알고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묵인하고 복녀가 갖고 온 말린 생선과 당시 비싼 술이었던 소주를 기분 좋게 마신다.

그러나 항상 복녀에게 화대를 주던 중국 부자 왕서방이 처녀장가를 간다.

결국 밥줄이 끊기게 된 복녀는 새색시와 초야를 치르기 직전에 왕서방을 찾아가 낫을 들고 행패를 부리는데 이를 말리려던 왕서방이 낫을 빼앗는 순간 복녀가 낫에 찔려 죽는 우발적 사고가 발생한다.

왕서방은 복녀의 남편에게 돈을 주고 사건을 무마한다.

비 오는 날 그 무능한 남편은 가마니로 싼 복녀의 시신을 마차에 싫고 장례를 치르러 가며 소설은 끝난다.

그리고 '벙어리 삼룡이'는 주인집 못된 아들에게 매질만 당하고 모진 학대를 받는다.

잠자는 삼룡이에게 똥을 먹이고 묶어 놓고 인두로 지지는 등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르지만 삼룡이는 주인 집 아니면 갈 데가 없어 반항 한번 하지 않는다.

갑자기 원인 모를 불이 나고 불난 집에서 주인을 구하고 다시 불 로 뛰어 들어가 곱디고운 작은 마님을 구하기 위해 마님을 고 불을 피하려 지붕으로 올라가 불에 타 죽지만 감히 근접할 수조차 없었던 고귀한 마님을 품에 안아 본 순간만은 진실한 행복을 느끼며 화염 속에 생을 마친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는 인력거꾼 김 첨지가 계속 비가 와서 일이 없는데 오늘은 나가지 말라는 아픈 아내의 만류를 뒤로하고 일을 나간다.

재수 좋게 손님을 세 명이나 태울 수 있었던 김 첨지는 날이 어두워지자 그날 번 돈으로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설렁탕을 사 들고 집에 돌아오지만 아픈 아내는 죽고 어린 아기는 죽은 어미의 젖을 계속 빨고 있었다.

이처럼 근대 소설은 결말이 대부분 비참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과 인물 또한 밝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어둡고 침침한 슬픈 토리에 간간이 독자에게 재미를 던져 주는 부분의 묘사가 내용의 지루함을 달래주지만 결말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난다.

20대 전후로 기억되던 나의 감성이 무슨 연유에서 한국 근,현대 소설에 심취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이후 어둡고 비참한 소설은 읽지 않았다.

미국 소설 시드니 셀던의 '깊은 밤 깊은 곳에'를 우연히 읽게 되었느데 그의 소설을 몇 권 더 읽고 난 후 시드니 셀던의 팬이 되었다.

특히 '천사의 분노' '시간의 모래 밭'은 화려한 배경, 현대적 감각의 장면들은 책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듯 흥미진진했고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 책을 놓지 못했다.

특히 독자의 예상을 뒤엎는 내용이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처럼 전개되어 시간 죽이기에는 안성 맞춤의 책이었다.

다들 그렇듯이 입시 때가 되면 교양 활동은 접어야 한다.

대입 준비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대학에 들어가도 전공 수업에 매달리면 좋아하는 책은 볼 시간이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시드니 셀던을 마지막으로 흥미 위주의 영화 같은 책은 이별을 고했다.

그래도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은 가끔 영화를 보듯 바빠도 책은 읽는다.

화제가 된 책들은 꼭 읽게 되고 책이 재미있으면 2편을 주문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다는 소리는 1년이 가도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들의 핑계로 들릴 뿐이다.

뉴욕에서 학교를 다닐 때 우연히 문화적 충격을 느낀 일이 있다.

1학년이 끝날 무렵 친구가 "Do you read Laotzu? 너 Laotzu를 읽니?라고 물어본 것인데 Lautzu란 단어를 몰라 그냥 아니라고 대답하고 나는 Laotzu가 뭐냐고 돼 물었다.

친구는 당황하듯 의아하게 쳐다보며 한국 사람이 Laotzu 도 모르냐고 다시 묻더니 모른다고 얘기하자 더 이상 Laotzu얘기는 꺼내지 않았고 휴대폰이 대중화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스펠링을 적고 집으로 갔다.

집으 돌아온 뒤 사전에서 Laotzu 찾았는데 Lautzu는 한국말로 '노자'였다.

너 노자에 대한 책은 읽고 있냐고 물어본 것인데 친구들은 다 알고 있는 유행하던 상식을 나 혼자 모르는 것 같아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미국에 오기 전 미국에서는 동양 철학이 인기이며 노자에 관한 책과 손자병법이 잘 팔린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지만 당시 젊은 층에게 동양의 노자가 유행하는 줄은 미국에 살면서도 전혀 몰랐다.

나는 서점으로 가서 나 혼자 무식했던 상식을 만회하기 위해 노자 관련 책을 몇 권 샀다.

출판 연도가 오래된 두꺼운 책은 단어들이 어렵고 해석된 문장들이 고어가 많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최근에 잘 나간다고 서점 직원이 추천해 준 책은 편안한 에세이 같은 책이고 일상에서 겪는 일들을 도덕경과 연결해 풀이한 책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노자에 관련된 책을 사서 공부하듯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친구들에게 무식한 놈으로 보이지 않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렇게 생에 처음으로 동양의 현대 철학가 노자를 미국에서 경험하게 되었고 이어서 서양의 현대 철학자 니체의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노자는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현실적 문제와 갈등을 인간 중심의 도리로 진실을 조명하고 무위자연으로 정치를 논하지만 오늘날에도 적용이 가능한 날카로운 비판을 도덕경을 통해 전달한다.

삶의 모순을 지적하되 논리정연한 해법이 보이고 우리의 일상에도 쉽게 연결된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다 보면 마치 탈무드의 비유를 보는 것 같지만 도덕은 진실에 이르는 결론임을 제시하고 내가 읽은 노자의 책에는 율법이나 종교적 색채는 보이지 않았다.

노자의 책을 몇 권 읽고 난 후여서 현대 철학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까닭인지 니체의 책은 보다 선명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가톨릭 교회가 유럽을 중심으로 서양 종교를 이루고 유럽의 문화 역시 가톨릭 영향하에 있던 시대였지만 니체는 교회법을 강하게 비판하며 천상의 것은 신의 영역이고 땅 위 모든 것은 인간의 세상이라 강조하며 선과 악, 긍정과 부정의 구분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구체적 현안들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특히 끊임없는 자기 개발을 통한 고귀한 가치에 대한 노력을 강조하고 천박한 세상사를 비판하며 통쾌한 분석으로 현실적인 사고의 변화와 안목의 향상을 주장했다.

선과 악의 구분은 바로 긍정과 부정의 해석으로 연결되고 일상에서 겪게 되는 마찰과 갈등을 현실적 관점으로 명쾌하게 풀어낸다

니체가 주장하는 해결 방안은 모두 인간의 삶에 중심을 두는 것이며 긍정의 가치를 최고의 선으로 지향하고 긍정의 힘은 언제나 고귀한 결과를 낳는다고 귀결지었으며 때로는 침묵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도 필역했다.

노자와 니체의 철학은 결코 난해하지 않은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는 생활의 지혜이며 인생의 안목을 향상시키는 친근하지만 위대한 사상이 담겨 있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올린지는 1년 6개월이 되어 간다.

인터넷 상에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블로그를 오래한 형의 권유도 있었지만 코로나 펜데믹으로 업무가 마비되던 시기에 시간이 많았던 게 직접적인 기회가 되었다.

사업을 하면서 기획서를 항상 쓰던 나는 메모와 노트를 하던 습관이 있었고 노트했던 내용을 편집해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응이 냉랭하여 조회 수도 낮았고 가뭄에 콩 나듯 댓글이 올라왔지만 글을 쓰면서 느끼게 된 것은 글을 통해 자신을 반추하는 시간이 많았고 내 안에 갇혀 있던 지식들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얻은 것만 같았다.

1년이 넘어가면서 글을 쓰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었고 그동안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님들의 소소한 일상을 보며 사람들의 살아가는 진솔한 모습을 보게 되었고 잊혀진 감성이 돼 살아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글에 댓글을 써 주시는 작가님과의 소통을 통해 짧지만 의미 있는 메시지가 오고 갔으며 한낱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에 공감해 주시는 작가님들과 교감을 하며 댓글에 담긴 정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작가님의 글에서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가요?"라는 질문에 나는 서슴없이 댓글을 올렸다.

나의 글을 진심으로 공감하는 사람이 한 분만 계셔도 나는 글을 쓰겠다고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통해 학습된 책 읽는 교육은 지금까지 지속되었고 책 읽는 습관을 나의 성장과 함께 프로그램을 달리하며 가르쳐 주신 사랑하는 엄마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오늘의 나의 변화와 성장은 엄마의 계획대로 진행된 결과이다.

바쁠 때는 잠시 책을 놓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요즘 너무 책을 안 읽는다는 느낌이 들면 다시 책을 찾게 된다.

요즘은 젊을 때만큼 책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실감이 되듯 수상작이나 베스트셀러 화제작을 읽어도 별다른 재미나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재미있고 유익한 책에 갈증을 느끼지만 생각해 보면 좋은 책이 없는 게 아니라 세월의 흐름 속에 풋풋했던 지난날의 정서가 메말라 버린 까닭이며 흐르는 시간과 함께 익숙해진 맛에 길들여진 감성이 별다른 유희를 발견하지 못하는 탓이라 사료된다.

지나온 세월 동안 다사다난한 사연들과 함께  어느새 중년이 되었지만 돌이켜 보아도 나를 성장시킨 것은 책 속의 경험이었고 힘겹고 고달픈 시간이 예고 없이 찾아와도 삶의 지표가 되었던 것은 책들이 가르쳐 준 삶의 지혜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지식의 향연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널려 있던 상식들이 지혜로 편집되는 것이며 흩어진 정보들이 교양으로 연출되는 과정이라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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