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4,500만 명에 달하는 히스패닉이 산다. 그 인구는 불법 이민자를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고 그들은 3D(Dirty, Dangerous, Difficult) 업종에 종사하며 임금도 매우 낮다. 그나마 법정 최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숙련된 종업원이며 대다수의 중남미 노동자는 불법체류자가 많다.
세탁소나 소규모 슈퍼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중국인 아니면 한국인이고 흑인들은 이주역사가 오래된 이유로 여러 분야에 종사하지만 젊은 흑인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 마약 딜러로 오해를 하고 밤에 흑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우범지대로 분류하여 출입을 금지한다.
흑인은 누구나 노래와 스포츠를 잘하는 인종으로 생각하고 동양인은 일만 하고 돈 버는 것 외에는 자신들의 문화밖에 모르는 이방인이며 사회참여 의식이 없는 경제적 소수민족으로 인식한다.
다인종, 다문화 국가이지만 보이지 않는 사회적 분류는 구분되었고 표면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인종과 출신 국가에 따라 정서와 문화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 내 인종 계층을 보면 상위는 백인, 그다음은 흑인, 세 번째는 동양인, 하위는 히스패닉으로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명확한 인종 순위가 정해져 있다. 인디언이 원주민이던 아메리카 대륙에 백인들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인권마저 말살된 흑인들은 노예로 끌려왔으며 먹고살기 위해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동양인과 중남미 사람들은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을 하며 살아야 했다.
나라별로 보면 아프리카 노예로 끌려온 흑인은 남부를 중심으로 정착을 시작했고 서부 캘리포니아에 이주한 중국인은 차이나타운을 형성했으며 이민 초기 캘리포니아 이민자의 40%가 중국인이었다. 일본인은 하와이에 정착하여 미국 최초의 아시아계 주지사를 배출했고 하와이는 일본계 미국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중남미 출신의 히스패닉은 과거 멕시코와 에스파냐의 영토였던 아메리카 대륙의 남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라틴문화를 형성했고 현재 미국 전체 인구의 14%가 넘는 인구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2008년에는 20명이 하원의원으로 재직했고 미국 최초의 히스패닉 여성 대법관도 배출했으나 여전히 미국 평균소득에 미치지 못하는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며 아직도 불법 중남미 이민자는 증가하고 있다.
백인들의 이민 지역도 나뉘어 있어 이탈리아인은 뉴욕으로 이주하여 지하철, 교량, 건설노동자로 종사했으며 이민자 중 뉴욕 노동자의 99%의 비율을 차지했고 아일랜드인은 보스턴에서 미국 최초의 아일랜드 시장을 배출하고 현재 보스턴 시민의 50%가 가톨릭 신자이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인 폴란드 사람들은 시카고로 이주하여 철강업 노동자로 종사했다.
가난했던 시대에 고달픈 이민역사를 가진 한국인은 로스앤젤레스에 100만 명이 넘는 코리아타운을 만들고 대부분 소규모 상업으로 정착을 하고 기능직 기술자도 꾸준히 증가했으며 뉴욕과 큰 도시에서 아시아 소수민족으로 성장했다. 2008년에 한국도 비자 면제 국가에 포함되어 90일간의 체류는 허용된 것을 보면 미국 내 한국인의 입지도 달라지고 있는 여건을 말해준다.
1920년 미국 인구 11%에 해당하는 1,400만 명은 이민자였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미국 대륙에서 태어난 유일한 원주민이며 미국은 여러 인종의 이민자로 구성된 거대한 국가이다.
미국의 달러가 세계경제지표의 기준이 되고 막강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국제정치, 경제 모든 분야를 주도하는 세계 최고의 국가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200년이 지난 역사가 흘렀지만 자본주의의 발전만큼이나 그 폐해도 증가하고 인종갈등의 고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잊을 만하면 인종차별 사건과 사고는 발생하고 세계 평화와 인류애를 지향하지만 미국에서는 앵글로색슨계 백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골프 클럽이 현재 300군데가 넘게 운영되고 있으며 정치, 경제의 핵심은 백인들이고 그들이 주도하는 주류사회의 지배계급은 미국을 주무른다.
미국 보수층을 압도하는 유대인은 미국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라 불리며 미국의 언론, 금융, 문화의 모든 분야를 장악했지만 유대인도 피부는 하얗고 각 분야의 최고 상위의 피부색은 2세기가 지나도 변함이 없다.
힘 있는 사람들이 먼저 와서 주인이 되어 영토를 확장하고 권력을 형성하면 도전할 세력이 없는 이상 그 권력은 뿌리를 내리고 번창하는 것은 자명한 순리이고 역사이다.
약육강식의 자연법칙과 꼭 같은 문명의 순환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백인이 주역으로 주도한 국가이므로 백인이 인종적 우월감을 갖는 지배계급이 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생계와 직업이 절실한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 밑으로 복속되어 삶을 유지한다.
그것은 선진국만의 상황이 아니고 단일 혈통, 단일 민족국가도 마찬가지이며 인도의 카스트제도의 흐름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그러나 계층의 차별과 불합리한 현상들이 피부색으로 대두되면 곧바로 인종차별로 연결되고 도미노처럼 확산된다. 뼈아픈 고난의 역사를 지닌 흑인들의 절규는 분명히 부당한 차별에 대한 분노이지만 인종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힘없는 자들의 불만과 절규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이든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며 정책을 만들고 행사하면서 불합리한 일도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언제나 그 권력의 피해자는 힘없는 계층이고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합리적 결정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사회는 시대와 정치, 사상과 종교를 초월해 존재하고 변할 수 없는 질서이며 법칙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던 공통적인 문화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그들의 공동체를 만든다.
그 공동체들이 사회를 구성하며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집단 간의 갈등과 마찰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때로는 충돌도 발생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는 동일한 현상이다. 그러나 지배층의 부당한 차별이 쌓이게 되면 소수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노골적인 분노로 표출되어 혼란이 일어나고 지역이나 사회계층 간의 충돌은 집단이기주의의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소규모의 마찰이라면 이익배분과 이해관계에 의한 합의를 통해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지만
종교적 분쟁과 사상, 인종 문제는 결말이 없는 위험한 사태까지 확산되는 것이 사실이다.
수세기 동안 이어지는 세뇌된 종교와 사상의 대립은 희생과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끝나지 않는 갈등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아직도 종교와 사상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테러는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으로 바꿀 수 없는 피부색은 곧바로 인종차별로 연결되기 때문에 종결이 없는 마찰은 언제나 예고된 불행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 대립과 충돌은 언제나 희생과 유혈 사태로 이어지고 막대한 피해를 남긴다. 그 피해와 희생의 대가는 어떤 보상으로도 치유될 수 없으며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미봉책만 반복될 뿐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종교, 사상의 갈등이고 인종문제이다.
오래전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에서는 기독교 여성이 직원들과 같은 컵을 사용한 것이 화근이 되어 신성모독으로 종신형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세계의 여론 때문에 8년간 복역한 후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프랑스로 망명을 했지만
직장에서의 사소한 문제가 종교 갈등과 집단이기주의로 확산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뉴욕 911 테러사건 이후 아랍계 미국인들에게 협박과 폭력, 가혹한 차별이 일어났고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미국 내 아시안계 미국인에게 폭력과 차별이 난무하고 인종혐오 범죄가 급증했다. 미국뿐 아니라 대형 사고와 사건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는 증오범죄는 근본적 문제와는 관련 없는 대다수의 같은 민족과 인종에게 무차별적인 불똥이 뛰는 현상으로 선량한 사람들에게 까지 고통이 확대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사건의 당사자 주위에는 자신들의 이익과 영향력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사건을 이용하는 세력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들은 사건, 사고의 규명과 해결방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사건을 사회문제와 접목시키고 포장하여 갈등을 조장하면서 정의 구현을 명목으로 사건의 피해자를 앞에 내세워 방송과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확산된 갈등과 혼란의 배후에는 남의 고통으로 이득을 얻는 집단이 있고 그들은 사건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다. 사건이 확대될수록 그들의 이익은 증가하는데 반해 그들의 선동에 동조한 대중의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 전체의 몫으로 돌아간다.
미국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그의 저서 ‘호밀밭의 파수꾼’ (The Catcher in the Rye)에서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가 100만을 넘어 200만 명에 이르렀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문제와 취약한 여건, 임금착취 사례가 뉴스에 드물지 않게 등장하고 그들의 생활모습을 방송하는 프로그램도 있는 걸 보면 증가한 외국인 비율과 함께 우리나라도 외국인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가족은 다문화 가정이라 하고 선진국에서 이주해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국제커플이라고 하는 차별을 한다. 이런 현상은 단지 출신나라에 따른 경제적 관점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구분된 인식의 골이 깊은 까닭이고 인종에 대한 막연한 배타적 사고가 잠재하기 때문이다. 조선족과 탈북민의 차별 문제 또한 적잖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일어나는 갈등이 확산되는 현상은 지구촌 어느 나라이든 동일한 사회적 문제라 말할 수 있다.
중국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한 이후 세계적 강대국으로의 기반을 다졌고 러시아 푸틴의 장기집권이 가능한 이유는 경제의 안정에 있었다. 1932년 대공황 당시 정치적 경제적으로 교류가 있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폐쇄적인 정책으로 블록경제(Bloc Economy) 정책을 실시했지만 실효는 일시적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세계 무역을 위축시키는 불행을 초래했으며
미국의 대공황이 세계적 대공황으로 확산된 원인은 경제 블록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았다.
그 이후 세계경제는 개방적 경제로 바뀌게 되었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성장했다. 교류와 협력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이고 화합 없는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의 피해는 미국과 중국만이 아닌 세계 경제에 막대한 악영향을 주는 것은 지구촌 누구나 실감하는 사실이고 선진국의 정치적 혼란 역시 곧바로 경제로 연결되므로 한 나라 경제의 침체는 그 나라 자국만의 상황에 그치지 않는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우리나라 물가도 상승하듯이 그물망처럼 연결된 세계의 경제구조는 우리의 체감 경제에 까지 영향을 주는 시대이다. 할리우드 개봉 영화를 우리나라에서도 꼭 같이 보고 해외 스타들이 입은 패션은 전국의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신종 바이러스의 전염 사태 또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도 함께 겪어야 하는 재앙이다.
세상에서 공존 없는 사회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정치, 경제의 흐름만은 결코 아니다.
유한한 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자원이 에너지라면 인간을 구성하는 무형의 자산은
인간 존엄의 가치이며 인격이 사람의 가치를 만들고 인격의 향상 없이는 성장도 발전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경제적 가치의 판단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계층이 구별되며 인격과 교양도 지폐로 포장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권력과 경제적 가치로도 절대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인간 존엄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가치 기준의 판단이 언제나 명확할 수는 없으므로 이성의 판단과 에고(Ego)의 욕망은 언제나 대립할 수밖에 없다. 에고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본성이고 자존감이며 욕구 충족을 위한 욕망이므로 이성보다는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 세상을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지적 충족의 욕구가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켰고 인간의 소유욕은 자본주의를 만들었으며 욕망 없는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인간의 욕망으로 거대한 현대문명을 건설했고 권력으로 조직된 사회가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자연을 파괴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욕망에서 확대된 인식의 오류는 착취마저도 정당한 사회현상이 되었고 정의는 언제나 권력의 편에 있었다. 유형적 성장에 비해 인간 본연의 가치는 변질되고 상실되는 현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함수관계인지 모른다.
이미 형성된 질서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묵인되고 인권이 없는 지역은 방치될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필연적 사회의 구조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회가 세상을 만든 것은 아니고 긍정의 에너지가 세상을 움직이고 발전시킨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자본주의는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 수 있지만 자유시장 경제는 언제나 정치,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유시장, 자유경제라 해도 언제나 경제원리에 의해 질서 있게 움직이는 사회구조가 자본주의이다.
기업이 과학과 경제를 발전시키고 기업의 업적으로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기업의 활동은 정당하고 합리 적어야 하며 이윤의 환원은 확대되어야 한다.
어떤 권력이든 수명은 길지 않은 특징이 있지만 기업의 경제활동은 인간의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므로 경제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는 정치가 지향하는 목적이 권력과 부의 창출에만 집중돼서는 안 되며 정치인은 도덕적으로 투명해야 한다. 목적으로 가는 과정은 공정해야 하고 정책의 혜택은 다수만이 아닌 소외받는 계층으로도 연결되어야 한다.
교류와 화합이 요구되는 이 시대에는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공동체 의식이 확산이다.
관념적으로 우선 되는 개인이 아니라 나에서 우리로의 개념이 변화되어야 공동체 의식이 형성될 수 있으며 사회적 환경과 매스미디어의 기능도 변화해야 한다. 언론과 방송은 권력의 하청 기관에서 벗어나 사실만을 전달하고 고급문화를 전파해야 한다. 고급문화란 부유한 계층의 호화로운 문화가 결코 아니다. 책 한 권을 보고 유익한 감명을 받는다면 그것이 고급문화이고 정서적 만족을 주는 교양 프로그램, 훈훈한 미덕을 전달하는 토크쇼, 왜곡 없는 역사 다큐멘터리가 수준 높은 문화이다.
사치를 성공의 전유물로 조장하는 방송이나 선정성을 예술로 둔갑시키는 방송, 말초적 감성을 자극하는 오락 프로그램과 폭력을 미화하는 영화가 지양해야 될 저질문화이며 특히 공정하지 못한 편향된 방송은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사회악의 주범이다.
학교는 인류와 자연을 위한 교육이 선행되고 과학과 경제교육은 인간 중심이 기본이 되어야 하며 입시제도에 얽매인 본질 없는 교육은 종식돼야 한다.
종교는 정의가 아닌 사랑을 전파해야 하고 종교지도자는 정치와 사상에 얽매어 서는 안 된다.
시냇물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만드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지만
지금 이 시대는 개인의 이익이 확대돼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이윤이 발생하는 구조가 우리가 직면한 세상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은 결코 공평할 수 없고 평등한 시선으로 사회를 볼 수도 없으며 평등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세기 동안의 시행착오를 통해 변화하고 발전한 사회구조와 조직에 적응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세상이고 교류와 협력 없이는 국가도 개인도 발전할 수 없다.
세상이 불평등하다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자신의 위치를 변화시키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오늘이 있기까지 인류가 만든 세상은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만든 세상의 힘의 원천은 대립과 투쟁이 아니라 화합과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나라이던 정치인의 부정부패와 대기업의 불법 경영은 소수에 불과하며 결국에는 법적인 처벌을 피할 수 없고 불평등의 피해 역시 소수의 힘없는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다.
영국 윌리엄 왕세손의 결혼식에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 중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초청받지 못했고 2018년 세계적 화제로 매스컴을 장식했던 영국 찰스 왕세자의 둘째 아들 해리 왕자와 미국 여배우 메건 마클의 결혼은 영국 왕실 최초의 흑인 혼혈 며느리라는 이유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아야 했지만 인종차별과 왕실과의 갈등,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해리 부부는 왕자로서 공식적 자격을 포기하고 결국 왕실을 떠났다.
근절되지 않는 소수의 부정 때문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서는 안 되며 그것을 이슈화 시켜 정치적 이득이나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세력들의 비열한 행위는 종식되어야 할 사회악이다.
녹록하지 않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만 다양한 사회가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노력한 만큼의 성과는 기대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개인의 이익은 공동체 안에서만 발생한다는 명확한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세계는 숨 가쁘게 움직이고 다가올 미래에는 어떤 변화가 도래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지구의 자전이 멈추지 않는 한 인류의 맥박은 계속될 것이다.
화합은 언제나 충만한 결실을 낳는 강력한 에너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