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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May 31. 2023

10. 이렇게 죽는 건가

트레킹 일지 Chap.3 하늘을 향한 길, 안나푸르나 트레킹

 

 ‘타토파니(Tatopani)’를 나서고 흔들다리 하나를 건너자 세상이 바뀐 듯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그냥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내가 어디 엄한 데로 들어 섰나?’ 싶을 정도! 게다가 계속되는 갈림길에 길 찾기도 난감한 상황. 결국 눈치를 슬슬 봐가며 가이드가 딸린 한 일행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그들이 쉬는 타이밍에 같이 쉬면서 염치 불고하고 대놓고 좀 따라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오르막 넘고 갈림길 건너, 눈칫밥까지 먹으며 도착한 ‘시카(Shikha).’ 아직 12시도 되기 전이라 부지런히 가면 2시쯤엔 ‘고레파니(Ghorepani)’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을 확인하고 잠시 한 숙소 앞에서 쉬고 있던 남자 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냥 그 숙소에 짐을 풀어 버렸다(역시나 오늘도 내팽개쳐진 계획). 그렇게 충동적으로 짐을 푼 숙소였지만 가히 만족스러웠는데, 옥상이 그야말로 히든카드였다. 


 방에 짐을 풀고 바람을 쐴 겸 옥상에 올라가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옥상엔 테이블도 비치돼 있어 그곳에서 밥을 먹으니 최고급 레스토랑이요, 낮잠을 자니 최고급 펜션이요, 빨래를 너니…… 이건 그냥 가정집이었다. 그렇게 오후 내내 옥상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한 여자가 올라왔다. 옥상에 오르자마자 “나이스, 뷰!”라며 소감부터 밝히는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괜스레 내가 뿌듯한 이 심정이란. 멋진 경치에 맛나게 담배 연기를 뿜는 그녀의 모습에 비흡연자인 나도 담배가 땡길 정도였다. 


 그렇게 만족스러웠던 옥상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동네 구경을 위해 마을 한 바퀴를 슬 돌고 저녁 시간에 맞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른쪽 발에 뭐가 들어갔는지 끈적끈적한 느낌에 신발을 벗었는데, 오 마이 갓! 예상치 못한 강렬한 붉은색이 나의 신발과 양말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강렬한 붉은색의 정체는 피였다. 도대체 왜 피가 나는지 무지함에 덜컥 겁이 났고 계속해서 씻어내도 멈추지 않는 피에 공포는 극대화됐다. 이에 원인 찾기에 나섰고, 단연 가장 의심되는 신발을 털어보니 뭔가 검은 게 툭 하고 떨어져나왔다. 


 으악! 이거 거머리인가? 이런 쳐죽일 자식! 그렇게 진짜로 신발로 거머리를 쳐 죽이고, 멈추지 않는 피에 결국 숙소 주인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나의 상태를 설명하자 손가락을 꿈틀꿈틀 움직여 보이는 주인아저씨.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웃으시며 옆집에서 반창고를 가져다주었다. 응? 이게 뭐야? 나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 같은데? 그냥 살짝 긁힌 게 아니라 피가 멈추지 않고 빠져나온다고! 내 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따위 반창고 하나에 의지하라는 말이냐! 어서 뭔가 있어 보이는 약이나 의료기기를 가져오란 말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 반창고를 붙이고 누웠다.  


 와이파이를 잡아 인터넷을 켜서 거머리를 검색해보니 어떤 성분 때문에 물리면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적혀있었다. 아…… 대한민국의 꽃다운 청년 하나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건가. 거머리에 물리고도 반창고 하나만 붙이고 죽어있는 내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나의 미개함에 얼마나 비웃을까? 흑…… 전날 반딧불의 영롱한 기운을 이 거머리 녀석이 다 빨아가는구나.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쇼크로 인해 점점 의식이 흐려졌고…… 다음날 아주 멀쩡히 일어나 피로 들러붙은 반창고를 떼어냈다. 말라붙은 피에 반창고를 떼어낼 때 좀 따가 웠지만 이를 마지막으로 거머리로 인한 고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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