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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Jun 02. 2023

12. 해와 달의 그림

트레킹 일지 Chap.3 하늘을 향한 길, 안나푸르나 트레킹


 새벽 4시부터 시작된 소음. 보통 이런 트레킹 코스에서는 남들보다 이른 출발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최소한의 불빛만을 사용하며 조심스레 사부작 사부작 준비를 하곤 한다. 뭐 이건 또 이것대로 신경이 쓰이는 데시벨이지만 그래도 “나 최대한 조심하고 있어요~ 나 예의 있는 사람이에요~”를 피력하기에, “그래. 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하며 암묵적으로 승인되곤 한다.  


 하지만 이건 대놓고 쿵짝쿵짝, 히히호호 아주 신바람이 났다. 이에 ‘아니! 아무리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여기서는 이것이 암묵적 규칙이었던 것! 일출 명소인 ‘푼힐(Poon hill)’을 앞둔 이 숙소에선 모두가 일찍 일어나고 빠른 준비를 위해 늦잠 자는 이들을 위한 배려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절대다수의 이른 기상과 준비로 인해 나 역시 억지 기상을 하게 됐다. 물론 나도 일출을 볼 계획이었지만 4시는 너무 빠르잖아? 난 결국 남들보다 1시간가량 늦게 숙소를 나왔다.


 그렇게 일출 맞이를 향해 가는 푼힐. 남들보다 늦게 나왔으면 당연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 히말라야라는 대자연은 심판관으로서 나를 채찍질했고,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날은 슬슬 밝아오고 있었다. 점점 검은 기운이 빠지는 하늘에 나의 다리와 마음은 조급해졌고, 내가 먼저 정상에 오르느냐, 해가 먼저 산을 넘느냐의 싸움이 시작됐다. 자연의 이치는 내게 남들보다 1시간 늦은 게으름에 대해 터질 듯한 허벅지와 심장의 고통으로 비용을 치르게 했다. 하지만 자연이란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자비심도 있는지라 이미 산을 넘어 떠오른 해를 구름으로 잠시 가려두었다. 그렇게 해가 구름의 방해를 받는 동안 난 정상에 오를 수 있었고 자연의 자비로움에 판정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곧 해가 구름마저 뚫고 그 바알간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정상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과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이야…….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사람들이 새벽 4시부터 부지런을 떨기 충분한 가치를 지닌 경치였다. 360° 뻥 뚫린 푼힐 정상을 동서남북으로 오가며 아침 햇살을 받아 빛을 내는 산을 구경했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눈부신 꽃. 아침해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꽃이 능선에 닿아 색이 번지듯 산을 물들였다. 


 아침햇살은 푼힐 정상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물들어 어린아이의 미소와 같은 순수한 기운을 빛나게 했다. 나 역시 그런 아침 기운에 이끌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듯한 이질감을 느끼며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는데, 네팔 남자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입고 있는 우의가 좋아 보인다며 자기에게 팔라는 것이었다. 응? 갑자기? 나의 이 성스러운 아침을 갑자기 수산물시장 경매장 분위기로 만들어 버린다고? 난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며 자리를 피했지만 남자는 내가 정상을 내려올 때까지 끝까지 들러붙어 나의 아침 감성을 바사삭 아작내 버렸다. 뭐 그래도 충분히 감동적인 순간을 누렸기에 후회는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족스런 해돋이를 마치고 도착한 ‘타다파니(Tadapani)’ 에서는 인도인 부녀와 한국인 아주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방을 쓰게 됐다. 타다파니는 그동안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며 본 곳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집결 된 곳이었는데, 방 배정을 받기 위해 모두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혼자이기에 방을 내주지 않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안내까지 들었으나 다행히 홀로 여행 오신 한국인 아주머니와 팀을 이뤄 앞서 언급한 인도인 부녀와 둘둘 짝을 맞춰 방 배정을 받을 수 있었다. 혼자서는 방도 구하기 힘든, 실로 서글픈 솔로의 삶이다. 


 하여튼 그렇게 어렵게 방 배정을 받고 좁은 방에서 넷이서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는데 한 네팔 청년이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곧 구름이 걷히니 모두 밖으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아니 오밤중에 왜 저러지?’ 하면서도, 이런 곳에서는 또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해야 손해를 안 보는 법인지라 무리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렇게 보름달이 뜬 히말라야를 마주할 수 있었다.  


 보름 달빛의 도화지 위에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이 마치 연필로 그린 듯 펼쳐져 있었다. 실로 기이하면서 오묘한 기운을 내뿜는 산. 마치 거대한 미술관에 온 듯 산은 신비로운 윤곽선으로 하늘에 그려져 있었다. 보름달의 빛과 히말라야의 공기, 밤 어둠의 농도가 만들어낸, 도대체 현실의 그림체가 아닌 듯한 광경에 아침의 일출과는 또 다른 감명을 받았다. 아침의 햇살이 희망차고 밝은 디즈니 풍의 그림체였다면, 보름달은 동양의 수묵화 같은 그림체를 선보였다. 


 아…… 자연이란 이처럼 다채롭고도 신비롭구나! 도대체 자연이 만들어내고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은 얼마나 되는 것인가. 죽을 때까지 열심히 여행하며 탐구해도 스쳐 지나가는 별똥별만큼밖에 보지 못할 것이다. 아쉽고도 기대되는 대자연의 신비. 그리고 히말라야의 아름다움. 이게 같은 산을 여러 번 반복해 오르는 이유인 것 같다. 아침과 밤에 감상한 히말라야의 두 작품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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