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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Jun 05. 2023

13. 깨우침의 날

트레킹 일지 Chap.3 하늘을 향한 길, 안나푸르나 트레킹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우박을 본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본 것이다. 꾸물꾸물 한 하늘에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고 곧 귀를 때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우박이 떨어졌다. 오랜만의 우박 구경에 신이 나 창에 얼굴을 대고 한참을 구경했다. 그래. 그렇게 구경으로써의 우박은 인생의 소소하고도 신기한 경험으로 남을 수 있으나, 구경이 아닌 체험으로써의 우박은 굳이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게다가 히말라야의 우박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우박처럼 귀여운 녀석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폭격처럼 때려 박는 얼음덩어리에 울고, 추위에 벌벌 떨며 가까스로 숙소에 이를 수 있었다(게다가 그 숙소가 앞서 언급한 담요 쟁 탈전을 한 숙소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안착한 숙소에서 몸을 씻고 마른 옷으로 환복하니 행복이 차올랐다. 하~ 판자대기로 지어진 집에 그저 스펀지 매트리스 세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이었지만 저 잔인한 우박의 폭격과 추운 바람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었기에, 평온과 평화를 약속하는 성채와 같았다. 그렇게 지친 몸을 녹이고 있는데 일행 중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께서 “이야~”하는 감탄사를 뱉으시더니 “내가 지금까지 너무 럭셔리하게 살았구나!”하셨다. 


 네팔까지 무려 비즈니스 좌석을 타고 온 아저씨는 소위 꽤 부유한 삶을 살고 계셨다. 해외 출장을 가서도 몇백 달러짜리 방에서 묵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기껏 1,000원짜리 방에서 묵는 자신을 보니 지금까지 너무 많이 갖고 살았다고 하셨다. 불의 열기처럼 진실되게 전해지는 아저씨의 깨달음. 우박에 뚜드려 맞아 텅 빈 몸과 마음에 아저씨의 깨달음이 나에게까지 채워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처럼 불현듯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는 진미를 맛보거나 절경을 마주할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행복과 뿌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나 역시 6개월여의 배낭여행 동안 번뜩이며 뇌리를 스친 깨달음의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에 비교하는 건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이처럼 한번 깨달음의 순간에 접촉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인다. 마치 2차원에 살고 있던 사람이 3차원을 보는 듯한 느낌일까? 


 물론 그 깨달음으로 인한 변화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초등학생 때 극기 훈련에 다녀오면 정말 어른들에게 인사도 크게 잘하고, 고사리손으로 어떻게든 부모님을 도와드리려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2주가 지나면 또 거짓말처럼 철없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있지 않았는가? 


 이처럼 비록 지금은 그 깨달음을 실천하며 사는지는 확신 할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인생을 바꿀만한 힘이 있는 경험의 순간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면서 나는 이런 깨달음의 순간을 느끼진 못했다. 물론 여러 면에서 감명을 받고, 배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원효대사의 해골물과 같은 머리를 때리는 깨우침의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이처럼 깨달음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하해河海와 같은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이날 우박이 때린 건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아저씨의 깨우침도 함께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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