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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Jun 08. 2023

15. 동행 & 친구

트레킹 일지 Chap.3 하늘을 향한 길, 안나푸르나 트레킹


 내가 걸었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크게 나누자면 세 구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 코스의 시작점인 ‘베시사하르(Besisahar)’ 마을부터 정점인 ‘쏘롱 라(Thorung La)’까지 가는 길이다. 이는 히말라야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 구경과 동시에 적당한 등산객과의 만남까지, 평화로우면서도 현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후 두 번째 구간, 쏘롱 라를 지나 ‘묵티나트(Muktinath)’로 들어서면 길의 분위기가 확 바뀐다. 마치 쏘롱 라라는 높은 고개로 인해 세상이 단절된 것처럼 묵티나트는 지금까지의 길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까지는 말 그대로 산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묵티나트는 생명의 푸른 기운은 찾을 수 없는, 잿빛 토양에 넓고 광활하게 펼쳐진 길은 마치 화성에 온 듯한 삭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후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과 산의 형태는 내가 다시 지구에 돌아왔다는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버스와 비행기를 타고 안나푸르나를 떠났기에 나와 같은 등산객이 많이 줄어 있는 길이었다. 조금은 쓸쓸한 시간이였달까?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라 할 수 있는 ‘푼힐(Poon hill)’과 이후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향한 길은 북적이는 사람과 지금까지와는 다른 안나푸르나의 느낌을 주는 길이었다. 마치 주말의 북한산과 같은 인파에 나는 화성에 이어 또다시 순간이동을 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동안 유유자적 산을 전세 낸 기분으로 등산했던 것과는 달리, 좁은 길에 들어찬 사람들로 인해 연신 길을 내어주고 질러가며 동선 관리에 큰 힘을 쏟아야 했다. 급작스레 늘어난 뇌파에 나의 머리는 지끈거렸다. 이전의 쓸쓸함이 그리울 정도로 평온했던 라운드 트레킹 코스가 그리웠다. 


 하지만 산의 다양한 면모처럼 이러한 상황도 그저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지금까지는 같지 못했던 동행이라 부를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선 푼힐 전망대와 ABC까지 가는 길은 ‘국민코스’라는 명성답게 많은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고, 그중 ‘석’동생과 50대 정도의 아저씨 한 분, 그리고 누나 한 명까지 무려 세 명의 한국인 동행을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세 명의 한국인들이 메인 동행이었다면, 네팔 친구 두 명과 일본인 친구 한 명까지, 반복적으로 겹치는 일정에 매일같이 롯지에서 모여 노는 사이가 됐다.  


 우선 가장 인상 깊었던 네팔 친구를 소개하겠다. 네팔 친구 중 ‘로잔’은 굉장한 패션을 선보이는 친구였는데, 소위 멋쟁이(나 너무 옛날 사람 같나?)였다. 개성 있는 패션만큼 성격도 쾌활하고 항상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긍정적인 기운이 흘러넘치는 친구였다. 로잔은 일본 유학 생활을 했는데 이로 인해 유창한 일본어 실력의 소유자였다. 이에 일본인 친구 ‘마유’와 우리 한국인들 사이의 통역사 역할까지 하는, 우리 일행의 핵심 인재였다. 로잔과는 이후 산을 내려와 카트만두에서도 따로 만나 술 한잔 할 정도로 친해졌다. 로잔이라는 현지인 친구 덕에 산에서도 현지인이 운영하는 작은 술집에서 네팔의 소주라 할 수 있는 ‘럭시’를 경험했고, 카트만두에서는 ‘똥바’라는 전통주를 경험할 수 있었다. 역시 현지인 친구는 여행에서 최고의 보물이다. 


 다른 한 네팔 친구인 ‘시바’는 로잔처럼 텐션이 높은 타입은 아니었지만 잔잔한 친근함으로 편안함을 주는 친구였다. 시바는 영화배우인가 싶을 정도로 빼어난 비주얼을 자랑했는데, 이에 로잔을 모델 삼아 사진을 얼마나 찍었던지. 하얀 설산을 배경으로 한 로잔의 비주얼이 담긴 사진은 그야말로 화보 그 자체였다. 


 마지막 외국인 친구 ‘마유’는 일본인이었는데 작고 조용한 여자였다. 마유는 로잔과 먼저 만나 친해진 상태였고, 이후 우리와도 연을 맺게 된 경우였다. 마유는 영어를 거의 못 하다시피 했기에 우리와의 대화는 거의 로잔을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에도 우리의 대화는 늘 즐거웠다. 다른 나라 친구와 대화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 이정도 불편함은 고난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롯지에서의 즐거운 시간과는 달리 마유는 산행을 힘들어했다. 길에서 마유를 만나면 항상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우리의 격려로(아마 로잔이 9할 이상이었겠지 만) ABC 입성을 이뤄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을까? 마유는 ABC 롯지에서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포함한 그날 ABC에 모인 사람들은 마유 덕에 진귀한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정체는 바로 헬리콥터였다. 


 마유는 롯지에 있는 전화로 헬리콥터를 불렀다. 두두두두두두! 이 항아리 같은 산속에 울리는 낯선 문명의 굉음은 모든 사람을 밖으로 이끌었다. 마유는 마치 타국을 떠나는 귀빈처럼 모두의 인사를 받으며 헬리콥터에 올랐다. 난 그 전까지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ABC에는 이처럼 위급상황을 위해 헬리콥터를 부를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고 했다. 물론 나로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기어서라도 내려갈 금액이었다. 롯지 주인도 정말 오랜만에 헬리콥터를 본다며 우리와 같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이후 로잔을 통해 들은 내용으로는 마유네 부모님은 꽤 부유했고, 마유는 이미 ABC에 헬리콥터를 띄울 수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ABC에 오른 것이었다. 그렇게 잔잔하고 고요한 ABC의 밤에 볼거리를 제공해준 마유. 비록 힘들어하는 마유의 모습에 마음이 안 좋았지만, 한편으론 부러움도 생기는 이 마음. 


 이처럼 각자 개성을 가진 세 명의 외국인 친구와 더불어 한국인 동행 중 대표로 ‘석’동생을 소개해보자면, (미안하지만?)처음에는 한국 사람인 줄 몰랐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에 긴 머리를 묶어 올리고, 무려 냉장고 바지에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신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옷도 민소매와 얇은 잠바 하나가 다인 그. 오죽하면 산을 오르는 포터들도 석동생의 복장을 보고는 신기해하고 걱정할 정도였다. 


 이처럼 자연인에 가까웠던 석동생은 인도 여행을 비롯해 한마디로 하드코어 여행자였다. 비록 겉모습은 하드코어지만 심성은 부드러운 친구로 ABC까지 동행을 하며 다툼없이 나름 잘 지냈다. 이로 인해 하산도 같이하고 이후 포카라에서까지 일주일 정도 같은 방을 쓰며 지냈다. 우리는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하며 간섭하려 들지 않았고 따로 시간을 보내다가도 밤이면 같이 모여 로컬 술집을 찾아 술을 마시고 놀았다. 


 석이는 다리운동 삼아 방에서 108배를 올리기도 하고, 수준급의 그림 실력으로 그림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놀란 한 가지. 같이 사용하는 화장실에 휴지가 내가 쓰는 것 외에 줄지를 않는 것을 의심하다가 혹시나 해서 석이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적중했는데, 석이는 네팔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본인도 대변 이후에 손과 물로 뒤처리를 해왔던 것이었다. 오우…… 여행자를 넘어 현지인에 가까운 적응력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도  사실 딱 한 번,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뒤처리를 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그날의 손 맛을 잊지 못한다. 


 하여튼 이처럼 독특하고도 잘 맞았던 석이는 네팔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동행이자 친구였다. 네팔은 안나푸르나로만 채웠어도 충분했겠지만, 이처럼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더욱 퐁성한 여행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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