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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Jun 01. 2023

11. 깨어난 파이트 본능

트레킹 일지 Chap.3 하늘을 향한 길, 안나푸르나 트레킹

 

 ‘푸르고 장엄한 산 안에서 고요를 느끼고, 등에 멘 배낭에서 삶의 무게와 욕심의 어리석음, 비움의 평안을 깨닫는, 내면의 성찰을 찾아 떠나는 히말라야’는 잠시 나가 있고! 야! 너 일로 와 봐! 이따금씩 마주하는 파렴치한 상황에 나를 금세 스트레스 가득한 현생으로 소환시켰다. 트레킹 코스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의 기운처럼 푸르고 청렴했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니, 부지런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 사회에 나 같은 게으르고도 의욕 없는 인간이 있는 것같이, 히말라야에도 어디서 묻은 것인지, 내리는 비에 섞여 온 것인지, 나와 같은 여행자에 의해 옮긴 것인지, 현생의 때가 묻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는 숙소에 짐을 풀고 간식거리를 몇 개 산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갑을 확인해 보니 1,000루피 지폐가 사라져 있었다. ‘아이고! 100루피를 낸다는 게 1,000을 냈구나!’ 하루 쓸 돈만 따로 지갑에 넣어 다니던 난 금방 돈이 빔을 알았고 조금 귀찮을 뿐 큰 걱정 없이 거스름돈을 받고자 다시 가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가게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오묘한 기운.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표정에서 ‘올 게 왔구나!’ 무언가를 지키고자하는 결연함이 느껴졌다. 


 이미 그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됨을 느꼈지만 그래도 최대한 상냥하게 “나 기억나지? 아까 과자 사 갔는데 100루피가 아니라 1,000루피를 준 거 같…….” “100 줬어!”  “응? 아니 내가 1,000…….” “100 줬어!”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100 줬어!”라고 반복하는 남자. 마치 “100 줬어!”라는 대사가 입력돼있는 게임 NPC와 같은 답답한 단호함을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의 싸움을 끝내려는 듯 등장한 아주머니는 100루피를 흔들며 나타나 남자와처럼 “100 줬어!”라고 외쳤다. 난 그들의 결연한 기세에 눌려 속으로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덕담을 해주며 가게를 나왔다. 숙소에 돌아와 과자를 먹는데 왜 이리도 맛이 쓴지. 비싼 과자니 맛있게 먹어야 했지만 나의 쓰린 속에 단맛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목전에 둔 롯지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는데, 이때는 그저 순순히 물러났던 지난날과는 달리 날선 언쟁과 자칫 몸싸움으로까지 번질 만큼 극도로 예민하고도 위태한 상황이 연출됐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 코스와 달리 ABC를 향한 길은 사람들이 가득했기에 한적한 시골에 있다가 도시로 나온 듯이 복잡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많은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생겨날 요소도 많았는데, 우리는 겨우 담요 하나로 인해 싸움이 났다.  


 ABC로 향하는 길에 한국인 동행을 만났고, 우리는 같이 길을 올랐다. 우리는 한 롯지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새로 만난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가 담요를 받기 위해 주인을 찾아갔다. 하지만 대뜸 우리에게 담요를 내줄 수 없다는 주인. 아니 도대체 왜? 우리는 돈 내고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인데 도대체 왜 담요를 주지 않는 것이냐 따졌다. 하지만 그저 막무가내로 없다고만 하는 주인. 


 “100!”을 외치던 마트 주인처럼 그저 “없어!”라는 말만 반복하는 남자. 이게 이곳의 말싸움 기술인가?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주인장 때문에 혼자 추론해 보건데, 아마 롯지에 있는 가이드와 포터들,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손님들의 담요를 먼저 챙기다 보니 수량이 부족한 듯 싶었다. 하지만 담요 없이 밤을 맞이할 수는 없는 상황에 나와 일행은 끝까지 담요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에 열댓 명 가까운 네팔사람들이 반격을 해왔다. 


 이전에 거스름돈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물러났던 때와는 달리 담요 없이 맞는 밤은 나의 생존과 직결된 일! 게다가 옆에 있는 동행의 존재는 거목처럼 든든했다. 결국 우리는 동행하던 아저씨와 동생 몫의 담요 두 장을 얻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내일 아침은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곤 방으로 돌아왔다. 힘겹게 얻은 담요 두 장을 아저씨와 같이 싸운 동생에게 주고 난 패딩을 덮고 잠을 청했지만, 우리를 조롱하는 듯한 열댓 명의 네팔사람들을 떠올리니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끝이 날 줄 알았던 싸움은 다음 날 2차전에 돌입했는데, 이 주인놈이 대뜸 거스름돈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다시 이런 개연성 없는 막무가내 공격에 나는 잠이 확 깨며 투쟁본능이 불타올랐다. 내가 쉽사리 물러서지 않자 기어코 마당에 있던 세숫대야까지 집어 던지며 위협하는 주인놈. 평소에 나였다면 이 정도면 지레 움츠러들 만도 하지만 당시 나는 오랜만에 깨어난 분노의 각성에 거칠 것이 없었다. 게다가 겨우 내 가슴팍 정도밖에 안 오는 쪼끄만 녀석이 길길이 날뛰어봤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강한 저항에 녀석은 포기한 듯 거스름돈을 내줬고, 이후 아침부터 후끈 달아오른 기운으로 ABC까지 내달렸다. ABC 코스는 라운드 트레킹 코스와 달리 오른 길을 다시 내려와야 했기에, 하산할 때 다시 그 주인놈과 마주쳤다. 그러자 그놈은 나를 잊은 건지 아니면 알고도 그러는지 하산하는 나를 보고는 히말라야 사람들의 특유의 선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참,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이렇게 절대 평안과 안녕만을 간직한 채 드라마만 찍다가 돌아갈 줄 알았던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의도치 않게 액션 장르도 끼워 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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