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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ug 19. 2024

가장이 된 엄마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빠를 만날 순 없었다. 아빠는 일 때문에 중국에 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와 나, 여동생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서도 찾아주는 이들이 많았다. 때론 어디 가서 강연을 하기도 했고, 때론 어디 가서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 불규칙했지만 비교적 수입이 고정적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나, 여동생을 보살필 수 있었다.

엄마는 한동안 집에서 식사를 만들거나 청소를 했다. 하지만 엄마 성격에, 괜히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으리라.

엄마는 집에서 걸어서 10분~15분 거리에 있는 작은 돈가스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프랜차이즈였는데, 우리도 종종 가던 집이었다. 다행히 사장님 부부가 너무 상냥하게 잘해주신다며 좋아했다.

엄마는 그 집에서 꽤 오랜 시간 일을 했다. 아르바이트로 얼마를 벌었는진 모르지만, 엄마는 꾸준히 일을 했다.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던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지인을 통해 작은 중소기업 일자리를 알아봐 줬다. 청첩장이나 현수막 등을 만드는 인쇄 업체였다. 지하철을 타고 한 30분 정도 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엄마는 그곳에서도 꽤 오랜 시간 일을 했다.

사무직이었고,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따뜻하게 일을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곳엔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았는데, 점심을 같이 먹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엄마는, 회사 근처에 작은 헬스장이 있어서 거기에 등록해 출근 전에 운동을 해야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 헬스장에서도 꽤 오랜 시간 운동을 했다.

이후 우리는 동생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내가 대학에 가면서 동생이 다니는 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다. 다세대 주택의 투룸이었다. 나는 지방에서 지내느라, 사실상 엄마와 동생만 지내는 집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떨어져 살면서도, 종종 엄마와 동생이 지내는 곳 근처에 와서 밥을 사주고 장을 봐줬다.

엄마는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만두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잘 빚어진 만두를 찜기에 가지런히 놓고, 만두가 맛있게 쪄지길 기다리다가, 손님이 오면 포장을 해 주면 되는 일이라면서. 일이 그렇게 어렵진 않다고 했다. 다행히 사장님도 친절해서 일하기 좋다고 했다.

엄마는 그 집에서도 꽤 오래 일을 했다. 아마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까지, 엄마는 집에서 만두가게를 걸어서 오가며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 근처의 돈가스 집에선, 내가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의 부모님과 그 친구를 만났다고 했다. 집에서 좀 떨어진 인쇄업체에선 지인을 만날 일이 없었고. 동생과 함께 살던 집 근처의 만두가게에선 동생네 담임선생님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표정을, 나는 빠르게 살폈다. 혹여 엄마가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았을지. 엄마의 표정은 별다를 게 없었다. 그 순간 엄마가 정말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을지, 아니면 찰나의 순간이라도 부끄러움을 느꼈을지, 아니면 꽤 긴 시간 부끄러워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

엄마는 나와 동생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서 우리 셋의 생활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밥을 해 먹고 과일을 사 먹을 정도는 되었다. 물론 거기엔 할아버지의 도움도 있었지만.

엄마는 그 나이까지 평생, 어디서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전공을 살려 옷을 만드는 곳에 취직을 했는데, 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자연스레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엄마는 지금도 농담처럼 말한다. "아빠가 결혼하고 나서 몇 달만 쉬다 다시 일을 하라고 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나니 별 말이 없더라?".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일 하는 거 너무 힘들지?". 엄마는 조금 힘들지만 그래도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엄마가 무슨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공을 살리는 것도 아닌데 조금이라도 벌 수 있으니 좋지, 라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생활이 빠듯하니 엄마는 조금 더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엄마가 억척스러워지는 것이 마음 아팠다. 엄마가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눈앞의 일에 매달리지 않고 조금은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을 텐데. 엄마가 조금 덜 힘들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기뻤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일을 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일을 시작하고 나서 엄마는 잠시 집에서 가사노동을 도맡았다. 사실 어쩌면, 밖에서 일을 하는 게 가사노동보다 덜 힘든 면도 있지만. 적어도 엄마가 남의 눈치 보면서 일을 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셋이 살기엔 나 혼자만의 월급으로는 조금 빠듯했다. 동생은 전공을 살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먹고 살기엔 아주 살짝 빠듯하거나 아주 딱 알맞은 수준이었다. 매달 돈을 모으는 게 사치라는 생각이 들 정도, 딱 그 정도였다.

그러자 엄마는 집 근처로 요양보호사 자격증 공부를 하러 다녔다. 정말 열심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 모두 나이가 들면서 거동이 조금씩 불편했고, 엄마는 두 할아버지를 종종 돌봤다.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며, 종종 웃었다.

엄마는 한 번에 시험에 합격했고, 3년 넘게 일을 하고 있다. 가끔 엄마는 침대에 누워 말한다. 엄마가 결혼을 하고 나서, 어디 가서 돈을 벌 거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여러 곳들을 거쳐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힘들지만, 이런 시간들을 쭉 지내다 보면 언젠가 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겠냐고. 쉬게 되면 그때 두 딸들과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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