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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pr 22. 2024

생각해 보면 이상했던 날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고작 1년 앞두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말에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은 다른 의견이 없었다. 의견이 있다고 하기엔 너무 어렸고, 모든 게 급했으니까.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땐 아빠가 오래 알고 지낸 동생과 회사 직원이 함께였다. 오래 알고 지낸 동생은 그 당시 우리도 삼촌이라고 부르던 사람이었고, 회사 직원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 언니는 1년 정도 영어공부를 할 거야."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30대 중후반이었을 거다. 우린 언니라고 불렀다. 이모라고 부르기엔 젊었다.


우린 미국에서 2층짜리 집에 모두 함께 살았다. 방은 총 5개. 그러다 삼촌은 한국에도 종종 왔다 갔다 하면서, 미국 생활은 주로 우리 네 식구와 언니가 함께 했다.


언니는 엄마와 함께 가까운 대학에서 랭귀지스쿨을 다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하루는 언니가 감기 기운이 있어 수업에서 먼저 돌아왔다. 엄마는 한창 수업 중일 시간, 나는 이미 하교한 터라 1층에서 숙제를 하다가 언니 상태가 심할지 궁금해 2층으로 올라갔다.


열린 문틈 사이, 언니는 이불을 푹 덮고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그 옆 아빠는 방바닥에 앉아 침대 쪽으로 엎드려 기대어 있었다.


나는 인기척을 낼 수 없었다. 순간 뒤로 조심히 걸어 나오며, 드라마에서나 봤을 법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렸다.


'아빠는 왜 누워있던 그 언니의 몸 쪽으로 고개를 묻고 엎드려 있었을까.'


열세 살의 나는 그 언니에게 데면데면하는 것으로, 그날의 일을 종이 넘기듯 넘겼다. 하지만 22년이 지난 지금도 그 방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그 언니는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우린 2년 정도 미국에서 더 머물렀다. 한국에 돌아가 결혼을 한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그 존재가 희미해질 때쯤, 열세 살의 내가 스물세 살이 됐을 무렵. 우리 집은 어려워졌고, 10평이 안 되는 복도식 아파트로 네 식구가 이사를 했다.


거실 겸 큰방이 하나, 주방과 맞닿은 화장실, 그리고 현관 앞 작은방이 있던 그 집. 좁디좁은 공간에서 아빠는 작은방에 콕 박혀 문을 닫고 통화를 할 때가 많았다.


"아빠는 방에서 회사사람이랑 통화 좀 할게."


가끔은 큰 고민거리를 의논하는 것도 같았고, 하하하 웃음소리도 들렸다. 그때 아빠는 번듯한 직업이 없었다. 공부를 하던 나보다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방 안의 전화통화 소리가 닫힌 문을 타고 바깥으로 넘어왔다. 외국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더 깊게 잘 들어가는 것 같았다는 뉘앙스의 얘기였다.


뉘앙스라고 표현을 하는 건, 그 시간 그 상황이 분명 존재하던 것이었지만 찰나의 순간, 부분 기억상실처럼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다.


그 이후에도 아빠는 종종 누군가와 통화를 오래 했고, 네 식구가 다 같이 어딜 갔을 때도 어김없이 자리를 옮겨 통화를 했다.


그러다 어느 새부터는 우리가 다 있는 자리에서도 통화를 했다. 반갑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쯤부터였다.


아빠를 생각하면, 속에서 신물 같은 게 올라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존재의 유무도 알 수 없는 회사에서, 작은 방 하나를 구해줬다며 나가 살았다.


이후에도 아빠는 종종 엄마와 나, 동생이 지내는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또 시간이 한참 흐르자 횟수가 점점 줄었고, 이젠 연락이 끊겼다.


아빠가 우리 늘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는진 모른다. 아빠에게 따져 묻기도 싫고, 엄마와 마주 앉아 이야기할 자신도 없다.


오래전, 드문드문 어린 나에겐 충격으로 다가온 기억들. 그때 왜 바로 따져 묻지 않았냐고, 나를 어리석게 볼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때의 감정은 희미하지만, 두렵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거다. 그래서 서랍장에 물건을 차곡차곡 넣고 서랍을 닫듯이, 기억을 닫아뒀다.


중년 남성에 대해, 아니 남성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커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재작년 어느 날, 엄마 이름으로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일이 있었다. 증명서를 발급하려던 순간, 서류에 이혼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뭐지?'


내 이름으로 된 서류엔 아빠로 남아 있지만, 엄마 이름으로 된 서류엔 없는 이름. 날짜를 보니 몇 달 되지 않은 시기였다.


나는 이 또한 따져 묻지 않았다. 남편에게만 조심스레 얘기했다. 순간, 남편도 조금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엄마는, 아빠가 친척들과 지인에게 빌린 돈을 갚느라 월급의 절반을 쓴다. 혹여나 엄마의 상처와 아픔을 후비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여전히 모른 척한다.


돈이 조금 부족하다는 엄마에게 종종 돈을 보낸다. 환절기 난방비가 가까워 춥게 지내다 된통 감기가 걸린 엄마에게, 오래전 덮어 온 일들을 들춰낼 자신이 없는 마음을. 이렇게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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