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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pr 15. 2024

걱정도 근심도 없던 시절

특별할 것도 없었다. 평범한 가정이었다. 아빠는 일을 했고 엄마는 집안일을 했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엄마는 전공을 살려 일을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었다.


"할머니가 좀 까다롭긴 해도,

힘들게 하진 않았어. 아프셨잖아."


엄마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편하진 않았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엄마는 수더분한 성격이고, 어떤 환경이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응하는 편이다. 할머니는 50대의 젊은 나이에 당뇨에 걸렸다. 90년도 초반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당뇨는 지금처럼 흔한 병이 아니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편도 아닌데 할머니는 제대로, 정확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엄마의 기억 속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이후 한참 나를 돌보다가, 어느새부턴가 몸이 많이 안 좋아져 침대에 누워있는 날이 더 많았다고 했다. 사진첩엔 나를 안고 유아용 욕조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꽤 많은데, 그것도 잠시였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며느리 집에만 있으니 요리학원도 등록해 주고."


내가 태어났고 3년 뒤엔 동생이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벌이가 좋았고, 아빠의 벌이도 나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차 안에 전화기가 있던 게 아주 인상적이었던 나의 어린 시절. 모든 걸 다 가진 삶은 아니었지만,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한 삶은 아니었다.


여섯 살이 되던 무렵 함께 살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떠나고 남겨진 다섯 식구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의 신도시로 집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엄마는 한참을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새로 이사 간 동네는 신도시답게 모든 것이 완전 새것이었다. 아파트도 학교도, 백화점도 모두 그랬다. 내가 8살이 되기 두어해 전에 문을 연 초등학교 역시 깨끗했다. 학교에 들어가 친구를 사귀고 공부를 했다. 수학 점수가 잘 나오지 않자, 아빠는 갑자기 과외를 받게 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친구와는 글짓기 수업도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이것저것 죄다, 시킬 만한 것들은 다 찾아 시켰구나 싶다. 그 동네에서 학원이 성행하기도 전인데 학원으로도 부족해 과외를 시켰다. 국영수에 음미체까지, 분야도 다양했다.


"할아버지도 아빠도,

너한테 쓰는 돈은 정말 아끼질 않았어."


할아버지와 아빠는 돈독한 부자지간이 아니었다. 사이에서 엄마가 마음고생을 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빠는 우리 식구에겐 따뜻했다. 엄마에겐 월급을 따박따박 가져다주는 남편이었고, 나와 동생에겐 이것저것 다 해주는 아빠였다. 아빠가 할아버지와의 사이는 안 좋을지 몰라도 우리 넷은 화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갑자기 이민을 떠나겠다고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도 꽤 되었을 때였다. 초등학교 입학보단 졸업에 더 가까운 나이인데 이민이라니, 갑작스러웠지만 그렇게 우린 짐을 챙겨 떠났다.


"아직도 그때 그 미국 동네가 눈앞에 선해.

집 근처 학교에 애들도 왔다 갔다 하고."


이민을 가서도 우린 풍족하진 않았지만 어려움 없이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돈이 대체 어디서 난 건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아빠의 벌이가 좋았지만 그 정돈 아니었다. 성인이 된 이후, 그때의 생각에 잠길 때마다 의문이 들었지만 누구에게 따져 물을 열정조차 사라져 버린 탓에 늘 생각에만 그친다.


3년. 이민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짧은 시간. 우린 결국 그곳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아빠는 우리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몇 달 전,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때 그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수영장 좀 자주 가볼걸."


엄마는 지금도 종종 그때를 그리워한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은, 지독한 향수병에 걸렸던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를 그리워한 적이 없다. 소위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때, 그 시간이 엄마는 그리운 거다.


아빠는 우리에게 늘 상냥했고, 무엇이든 좋은 것을 주려는 여느 아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릴 적, 엄마도 좋아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은 아빠에게 더 기울어지는 날도 있었다. 생김새가 닮아서일 수도, 성격이 비슷해서일 수도 있고.


유독 아빠를 좋아했다. 이것저것 '다 해줘서'라고만 설명하긴 어렵다. 어릴 적 나에게 아빠란, 불가능이란 없는 슈퍼맨과도 같아 보였으니까.


지금 우리의 곁엔 그런 아빠가 없다. 식당에서 밥을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아빠와 엄마, 두 딸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여행을 떠나서도 그렇다. 낯선 여행지에서 남편과 함께, 혹은 엄마와 함께 사진을 찍다가 문득 주변을 본다. 아빠와 엄마, 두 딸이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때면. 그럴 때면, 가끔은. 어릴 적 우리와 어디든 함께 다니던 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질문을 속으로 삼킨다.


감추고 싶은 시간들이지만, 이제는 마음이 좀 나아졌습니다.
조촐하지만 화목했던 네 식구가 세 식구가 된 시간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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