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닌 지 3년 차가 되던 해 이직을 했다. 새로 간 회사엔 여자 선배들이 많았다. 대부분 아직 미혼이었지만, 몇몇 결혼을 한 선배들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도 다닐 만한 회사구나.'
이직을 한 뒤 몇 개월이 지나자 육아휴직을 떠났던 한 여자 선배가 복귀를 했다. 내가 입사를 하기 전에 이미 휴직에 들어간 터라, 복귀 후 처음 보게 된 선배였다.
우연히 선배와 같은 부서, 같은 팀이 되었고 함께 일했다. 일을 할 때 늘 꼼꼼하면서도 함께 하는 동료, 특히 후배를 돌아볼 줄 아는 선배였다. 정이 많다기보다는, 주변을 살피고 재차 확인하는 성격의 선배였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 회사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동종 업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협회에서 상까지 받았다. 그 선배는 굉장히 기뻐했고, 함께 한 또 다른 남자 선배도 좋아했다. 나 역시 기쁘고 좋았다.
이직을 한 지 1년 조금 넘었을 때라, 회사에 이제 막 적응해 나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회사가 낯선 시기였는데 좀 더 마음을 붙여서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 드는 계기가 됐다.
상을 받은 기념으로 회사 여러 부서에 떡을 돌렸다. 사실상 모든 부서에 떡을 돌렸는데 유명한 떡집을 찾는 것부터 배달을 받아 각 부서에 일일이 돌리는 일도 그 여자 선배는 함께 했다. 물론 주문은 막내인 나에게 시켰지만, 사실상 모든 걸 함께 했다.
"올~ 워킹맘~ 축하해!"
접점이 많진 않지만 종종 보는 부서의 장이었다. 여자 선배보다는 나이가 조금 더 많거나 비슷해 보였다. 물론, 같은 여자였다. 그렇다. 선배는 워킹맘이었다. 함께 일을 하면서 느끼지 못했다. 워킹맘이라고 해서 다를 게 뭐 있겠냐마는, 선배는 업무시간 내내 일에 올인했다. 적어도, 곁에서 느끼기엔 그랬다.
아마 일을 하는 내내 머릿속으론 등원을 한 아이 생각이 가득했을 수도 있고, 겨울철 감기가 걸린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선배와 나는 그로부터 1년을 더 함께 일했고, 때가 되어 부서가 나뉘어 떨어지게 됐다. 그래도 건너 건너 자리에 앉아있는 선배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러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 선배가 되어야지.'
그리고 1년 하고 몇 개월이 더 지났을 무렵, 우연히 다른 사람을 통해 선배의 근황을 듣게 됐다.
"지현 선배 회사 그만 둘 거래."
새 부서에서도 일을 빠르게 익혀 성과도 내고 있던 때였다. 대체 왜?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성격상 곧바로 선배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얼마 지났을 때쯤, 선배에게 안부 인사차 연락을 하며 운을 뗐다.
"응, 그렇게 됐어. 남편이 해외 발령을 받았는데 아이랑 다 같이 가기로 했어."
그럼 선배는요? 선배의 커리어는요? 남편이 해외 발령을 받았는데 왜 온 가족이 가야 하는 것이냐고 물어보진 못했다. 분명 개인적인 상황이, 속 사정이 있을 테니까.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과 함께, 해외 가실 준비로 바쁠 텐데 건강 잘 챙기며 준비하시라고만 답했다.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남편의 발령 기간이 짧지 않고 그래서 서울의 지을 처리 해야 한다고 했다. 친정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가 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함께 해외로 나가는 편이 더 나았을 거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후 선배는 사표를 냈고 회사를 떠났다. 선배가 퇴사한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내 결혼식을 앞두고 선배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직접 청첩장을 줬다.
"선배를 보면서, 결혼을 해도 괜찮겠다 싶었거든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잖아요."
한참 웃음을 머금고 있던 선배의 입꼬리가 잠시 내려왔다.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동안 말을 멈췄다. 아마 선배의 머릿속엔 바쁘게 일을 하던 어느, 평범한 하루가 그려졌을지도. 아니면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을 협회에 출품하던 시기가 떠올랐을지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육아휴직 중이던 어느 날이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선배는 제 미래였어요."
선배를 처음 봤을 쯤까지만 해도 나는 분명 비혼주의자였다. 하지만 선배를 보며 마음이 조금 옅어진 것이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랬다. 결혼을 하고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고도 열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배를 보고 알았다.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서도 회사 안팎에서 인정받는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이 반드시 여자의 발목을 잡진 않는구나.'
하지만 지금, 회사에 선배는 없다. 선배가 회사를 떠난 게 '아이'이거나 '남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편의 해외 발령'이 발단이 된 건 맞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선배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니 아이가 없었다면 적어도 이렇게 회사를 떠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만 할 뿐. 선배는 해외에 나가, 일을 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생활이 익숙해지시면 꼭 이것저것 해보세요!"
애써 기분 좋게, 목소리 톤을 높여 말했다. 하지만 슬펐다. 결혼을 결심하고 난 뒤에서야 들려온 선배의 퇴사 소식에 동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청첩장까지 나온 상태니 결혼을 무를 순 없지만, 나도 먼 미래에 언젠가 선배와 비슷한 방향으로 걸어가지 않을까, 겁이 났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네가 하기 나름이지!"라며 응원해줬지만, 상황이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지 않나. 그 누가 뭐라 해도 굳세게 내가 갈 길만 바라보고 걸어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 아무리 내가 내 신념을, 가치관을 뚜렷하게 가지고 간다고 해도 사람 일은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니, 확신할 수 없었다.
뒷 이야기지만, 선배가 퇴사를 한다는 사실을 결혼을 준비하는 중에는 알지 못했다. 나는 남자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결혼을 하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지금까지 해왔던대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지현선배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선배는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텐데도 정말 멋있게 맡은 일을 다 하고 있다면서. 남자친구 역시 선배를 향해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런 선배가 퇴사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청첩장을 주문한 상태였다.
결혼을 무를 순 없었다. 선배가 결국엔 퇴사를 할 걸 알았다면 아니, 내가 결혼을 준비하기 이전에 선배가 퇴사를 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결혼을 망설였을까. 나=선배, 나와 선배가 같지 않다는 걸 안다. 우린 서로 다른 사람이고, 생각도 가치관도 걸어갈 길도 다 다른 아예 다른 객체니까. 하지만 같은 일을 하는 여자 선배에게서 받는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여자라면 누구나 깊이 공감할 부분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성은 여성을 동일시한다. 물론 오히려 그런 부분이 여성들을 어떠한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선배의 퇴사 소식을 듣고, 남자친구에게도 이야기를 전하니 많이 아쉬워했다. 일을 좋아하고 잘하던 선배인데 그럼 이제 외국으로 나가 육아에만 전념하겠다며 가까운 사람 일처럼 아쉬워했다. 먼 미래에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펼쳐진다면, 우린 어떻게 헤쳐 나가게 될까. 궁금했지만 벌써부터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머리가 아파 그냥, 이불을 덮듯 덮어두었다.